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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6월 21일 )
독립이 자유롭게 사는 조건이라면 여자는 결혼해서는 안된다.(자멘 그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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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누구를 위한 것인가?
 관리자    | HIT : 4,868 |
                                복음, 누구를 위한 것인가?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이제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았고 그 안에 선 것이라.만일 너희가 내가 전한 복음을 굳게 잡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다면, 복음을 통하여 너희도 구원받은 것이라.(고전15:1-2)

저는 오늘 설교제목을 복음 ,누구를 위한 것인가? 라는 제목으로 설교하고자 합니다.
복음,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라고 질문한다면 여러분은 누구를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아마 쉽게 나오는 대답이 "그야 세상에 있는 구원받지 않은 죄인들에게 필요한 거지"라고 말할 것입니다.
저는 그 답을 30점 짜리 답이라고 말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 설교가 끝이 나면 복음이 누구를 위한 것인가? 라는 질문에 여러분 각자가 100점 짜리 답을 하게 되길 바랍니다.  
본문 고린도 전서15장을 통하여 복음이 "세상에 있는 죄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럼 또 누구를 위한 것이겠습니까? 저는 3부류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1.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고린도전서15:3절은 복음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기술하고있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복음을 형제들에게 전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지 않은 세상의 죄인들이 아닌 것입니다. [형제들아]! 라는 호칭은 성도들을 말합니다.
바울은 2차 전도여행에서 1년6개월 동안 고린도에 머물면서 복음과 진리를 증거했는데 그래서 고린도 교회가 세워졌고 약4 - 5년이 지난 후 다시 그들에게 서신을 통해 다시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곳 뿐만 아니라 바울은 롬1:15절에서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로서는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을 전할 준비가 되어있노라.]는 이 말은 구원받은 로마의 성도들과 구원받지 않은 이방인 모두를 포함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구원받지 않은 로마에 있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것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로마에 있는 너희인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로마에 있는 너희]라는 대상이 앞의 문맥의 6절을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고, 7절에 의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로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편지 하노니]라고 말하고 있으며, 8절에 의하면 로마에 있는 [너희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해짐이라]고 말함으로써 수신자가 교회의 구성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복음이 "교회 안에 있는 사람"에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성도가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사람에게 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다니지만, 교회 안에 있기는 하지만, 구원받지 않은 교인들에게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많은 육신적인 행태들을 전해듣는 가운데 그들이 과연 복음을 아는가?
정말 구원받았는가? 하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다시 전하고자 하는 필요를 느꼈을 것입니다. 목적은 행여라도 그들 가운데 한 사람도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 있어서는 안되기에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전했던 복음을 다시 전해야 할 필요를 느꼈던 것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했던 복음을 그들이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기를 바랬고 따라서 그들 모두가 구원받았기를 바랬습니다. 바울은 [너희가...헛되이 믿지 아니하였다면]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말 속에는 "헛되이 믿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암시되어 있다.
그럼 어떻게 믿는 것이 헛되이 믿는 것이겠습니까? 말로만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 헛되이 믿는 것입니다. 살전1:5에서는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말 속에도 역시 "말로만(머리로만) 복음을 믿는다고(안다고)"고백할 수 있는 가능성이 암시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결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되기에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다시 반복해서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 복음은 [마음으로 믿어....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에]이릅니다(롬10:9,10).
제가 구령하다가 교회 다니는 사람임을 알게 될 때면 "그러시면 복음아십니까?"라고 질문을 합니다.  구원받았습니까?라고 물어보면 다른 말들(세례,모태신앙,... 구원파죠) 그런 말을 하니까 복음을 아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경험에 근거한 결과 대다수의 대답이 "아니요, 글쎄요, 몰라요, 그게 뭔데요. 또는 무슨 복음을 말씀하시는지.. 마태복음..이요? 아님 마가? 누가?... 순..복음이요? 라고 말한다. 이런 대답들을 들을 때면 사도 바울이 왜 고린도 교회에 다시 복음을 전해야만 했는지를 공감하게 됩니다. 심지어 다가가서 "교회에 다니십니까?"하는 질문에 답을 듣기 전까지는 그들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판단불가능한 사람들도 만나게 됩니다. (빨강머리, 노랑머리, 찢어진 청바지...)
왜 복음을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시 전하는 것이 필요한가라고 질문을 한다면 그에 대한 답은 무엇보다 "구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들었다해도 머리로만 알고 있고 말로만 고백하는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지 않으면 안되기에, 결코 지옥에 가서는 안되기 때문에 반복하여 전하는 것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같이 반복해서 전하는 모습은 주님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막9:44-48절을 통해 지옥을 세 번이나 반복해서 증거하셨습니다.
[그 곳에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막9:44절)(46절)(48절)
주님은 왜? 별로 듣기에 좋지도(?) 않은 말씀을, 단어하나 틀리지 않는 말씀으로, 한 절 간격을 두고, 세 번이나, 반복해서 전하시고 있는 것입니까? 생각해 보셨습니까?
아마도 주님은 첫 번째 44절을 읽을 때 혹 딴 생각하다가 그냥 지나치지나 않을까.. 두 번째 구절을 읽을 때는 그냥 머리로만 알고 지나치지는 않을까...해서 마지막 세 번째 48절에서만큼은 마음으로 받아들여 아무도 지옥의 실체를 가지 않게 하시려고 3번에 걸쳐서 기록하시지 않으셨는지...  
그런데 한글개역 성경은 같은 구절이 세 번 반복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46,48절을 삭제했습니다.  
주님은 강조할 필요가 있으셔서 세 번을 반복하셨는데.... 중요하기 때문에 반복하셨는데 누가 주님의 의도를 무시하며 성경을 삭제하는 것입니까?
그래서 그 성경을 삭제하지 말라고 더하지도 말라고 그 역시나 세 번에 걸쳐서 손대지 말라고 강력히 경고하셨는데 말입니다.
첫 번째는 성경의 앞부분인 신명기6:4절에서, 두 번째는 성경의 중간 부분인 잠언30:6절에서 마지막 세 번 째는 성경의 마지막 책 마지막장의 계22:18-19절에서 한 번 더 경고하셨습니다.
여러분! 왜 성경을 삭제하거나 첨가하지 말라고 세 번씩 이나 경고하신 것입니까?
왜 지옥이라는 장소에 대한 말씀을 세 번이나 강조하신 것입니까?
왜 교회 안에 있는 사람에게 재차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까?
결코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 교회 안에 있어서는 안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먼저는 교회 다닌다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아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그들이 세상에 있는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구원 받은 사람이 모인 곳이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 안에는 반드시 구원받은 성도들로 채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면 교회아닌 교회들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살아있는 동안 교회는 열성적으로 다녔건만, 거기에다 새벽기도, 금식, 철야기도회에도 빠지지 않고 다녔건만 정작 복음을 듣지 못해서, 들었어도 헛되이 머리로만 믿고 있었다가, 또는 다른 복음(갈1:8)을 듣고 구원받은 것으로 착각하며 살다가 결국 죽어 지옥에 갔다면, 그 사람보다 더 비참한 사람이 있을까요? 그 사람이야말로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비참한 사람이라.](고전15:19)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송오 목사님은 가장 불쌍한 사람이 세상에서 지지리 고생하다가 죽어서도 지옥에서 고생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정말 불쌍하지요?
그러나 불쌍한 것과는 다르게 가장 비참한 사람은 교회만 다니다가 지옥에 가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은 구원받았습니까?
무엇보다 복음은 먼저 교회만 다니는 구원받지 않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복음, 누구를 위한 것인가?
2. 구원의 확신이 없는 성도들  
구원의 확신이 없다면 복음을 아는 것이 아니기에 그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고전15:12절을 보니 복음을 전해들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부활의 확신이 없었습니다.
아니 부활을 아예 믿지 못했습니다. [어찌하여 너희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하느냐?] 복음을 받았는데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구원의 확신은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이들처럼 교회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면서도 구원의 확신은 가지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역시나 복음을 아는 것이 아니다. 교회 다니는 구원받았다고 하는 사람에게 당신이 지금 죄를 짖고 그 죄를 회개 할 기회도 갖지 못한 채 죽게 되었다면 어디에 갈 것 같으냐고 물어 보면 제가 경험한 결과에 의하면 약75%정도가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지옥에 가게 된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는 구원의 확신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사도 바울은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그 사실성과 중요성에 대해서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부활이 어떤 몸을 입고 어떻게 부활하게 될 것인지 부활의 순서와 그 원리 등에 대해서 15장 전체를 할애해서 자세히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은 사실이었기에 예수그리스도의 당대에서부터 지금까지 누구도 반박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이 고작 할 수 있었던 일이라고는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지 말라고 협박하는 일 뿐이었습니다.
[ "우리가 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야 할까? 실로 그들을 통해서 행해진 뚜렷한 기적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 일이라. 그러나 더 이상 백성가운데 확산되지 못하게 그들을 엄히 위협하여 이후로는 아무에게도 이 이름으로 말하지 못하게 하자."하고 그들을 불러서 명령하기를 "절대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하더라.](행4:14-20)
뭐 하러 위협합니까? 뭐 하러 쫏아 다니면서 입을 막으려고 수고합니까? 수고할 필요 없이 예수님의 부활이 거짖임을 증명해 보이면 될 일이 아닙니까? 예수님의 시체를 광장에 공개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시체를 제자들이 훔쳐 같다면 제자들에게 현상금을 거액으로 걸면 찾을 수 있고 그럼 입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도 그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왜요? 예수님은 실재로 부활하셨기 때문에! 무덤이 비어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헛것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14,17,58절)-- 전파하는 것, 믿음, 수고!
헛것이라는 말은 "내용물이 없이 비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 말을 할 때 예수님의 빈 무덤을 의식하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있지 않다면 우리의 믿음과 실행은 헛것이지만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있어 "예수님의 무덤이 헛것"이라면 우리의 믿음과 수고는 결코 헛것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이 말하고 싶은 것은 너희가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다면 너희가 구원받은 이 후에 지은 죄와는 상관없이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와 같이 부활할 것이니까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굳게 잡고](2절)있으라고 그리고 마지막 58절에 가서는 다시 한번 [그러므로 견고하라, 흔들리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 구원의 확신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고 있는 사람은 견고합니다. 흔들이지 않습니다. 불안하거나 초조함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치 못한 사람들은 불안하고 초조하고 흔들입니다.
서울역에 가면 새마을 호를 타는 사람들과  비둘기호를 타는 사람들의 현저한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새마을 호를 타는 사람들에게는 불안 초조 흔들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비둘기호를 타려는 사람들은 우왕좌왕 난리도 아닙니다.
왜 이런 차이가 있습니까? 새마을 호를 타는 사람들이 공중질서에 대한 교육을 잘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까? 아닌 것입니다. 새마을 호를 타는 사람들에게는 좌석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둘기호에는 좌석이 없습니다. 먼저 달려가서 앉는 사람이 임자입니다.
그래서 앞다투어 달립니다. 달리면서도 자리에 앉기까지는 자기가 앉을꺼라는 확신이 없는가운데 달립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불안 초조 흔들림의 빛이 역역합니다. "과연 내가 자리에 앉을 수 있을까? 저렇게 열심히 뛰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 " 여러분은 여러분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음을 확신하고 있습니까?
성도의 구원의 확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라는 근거 하에서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성도는 다른 종교인들이 믿는 것처럼 마냥 바라고 덮어놓고 믿는 것이 아니라 사실에 근거한 믿음이기에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이 교회 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복음인 것입니다.

복음, 누구를 위한 것인가?
3. 복음을 모르는 성도들(헌신하지 않는 성도들)
고린도 교회를 향한 서신은 책망(딤후3:16)을 위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관한 소식을 클로에 집안의 사람들을 통해서 듣고 이 서신을 쓰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육신적인 행위들(시기, 다툼, 분열,..)을 듣는 상황에서  복음을 다시 전하고 있는 것은 대단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다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곤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다 구원의 확신을 가진 성도들이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 "복음을 아는 성도들"이라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다시 말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이제 너희로 알게 하노니"라고 말입니다.
바울은 그들의 관한 실망스런 소식을 접하고 나서 그들에게 한마디만 전해달라고 누군가가 요구했다면 이렇게 말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너희가 복음을 아느냐? 라고 말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 역시나 한마디로 말한다면 사랑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그들의 문제를 진단한 결과 사랑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는데 그래서 그 유명한 사랑의 장이 고린도 전서 13장에 서 나오고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14:1절에서는 그 무엇보다 사랑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많은 그들의 문제를 지적한 뒤 사랑이 무엇인지 정의해주고 추구하라고 말하는 가운데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사랑을 회복하고 추구할 수 있는 비장의 카드를 본문 15장에서 꺼내어 들고 있습니다.
그 카드는 다름 아닌 복음이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의 죄들로 인하여 죽으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들로 인하여 죽으시고...]
분명 사도 바울은 형제 사랑을 회복하고 추구하게 하고, 나아가 헌신하게 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치유책이 복음이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두 번째 서신인 고후5:14절에선 말하길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느리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억해 내기만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5:12)는 말씀을 기억할 줄 알았을 것입니다. 바울의 마음은 이러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너희를 압도하지 않았느냐? 그 복음을 듣고 너희가 눈물로 회개하고 내가 그 분과 하나 되겠다고 침례도 받지 않았느냐? 내가 그 분을 위해 살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가 그 사랑을 벌써 잊었단 말이냐?
그렇다면 내가 다시 너희에게 복음을 알게 하겠노라!
'그리스도께서 너희의 죄들로 인하여 죽으시고 장사 되셨다가 삼일만에 부활하셨다'그 사랑을 기억하고 실천하라! 그러면서 빌립보 교회에게 했던 말도 해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오직 너희의 행위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되라. 이는 내가 가서 보든지 멀리 떨어져 있든지 너희가 한 영 안에 굳게 서서 한 마음으로 복음의 믿음을 위하여 함께 싸우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자 함이라](빌 1:27).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복음을 위해 싸울 수 없게 됩니다.
아무리 대단한 믿음과 소망과 여러 은사가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사역을 맡기실 때 베드로에게 점검했던 것도 다른 무엇이 아니라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이 또 얼마나 중요하던지 3번을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21:15,16,17)  
바울은 이제 고린도 전서 15장을 통해서 복음을 다 증거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다시 알게 한 목적을 마지막15:58절에서 증거합니다. 보십시오!
바울은 마치 책상을 내리치며 결론을 내리듯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다시 알게 한 목적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라, 흔들리지 말라, 항상 주의 일을 넘치게 하라. 이는 너희의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아니한 줄을 너희가 앎이니라.](고전15:58). "견고하라(구원받았다면) 흔들리지 말라(구원의 확신을 가졌다면!) 항상 주의 일을 넘치게 하라(그리스도께서 너를 위해 죽으셨으므로!)
명제는 이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복음을 통해 구원을 받고, 복음을 통해 구원의 확신을 가지며, 복음을 통해 주의 일을 넘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까지 아는 것이 복음을 아는 성도 인 것입니다.
C.T 스터드(46년 동안 중국, 인도 선교를 하고 중앙 아프리카를 개척한 선교사,1862~1931)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대학4년을 다닐 때까지는 주님과 관계없이 살았었습니다. 캠브리지 대학을 수석으로 입학한 수재였고 집안은 부유했으며 얼굴도 잘생겼고 당시 교내의 큰 인기 있던 운동인 크리켓 챔피언이기도 할 만큼 운동도 잘했다고 합니다. 그런 그가 교내 수련회에서 D.L 무디를 통해서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죄인으로 지옥의 형벌을 당할 자였으나 예수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그 때 선교사로 동역할 사람을 모집한다는 소리를 스터드가 듣고는 즉시 아프리카의 선교사가 되겠다고 헌신을 하였습니다.
그 때 주위에서 사람들이 그를 만류하기 시작하며 한 마디씩 합니다. "스터드, 신중히 생각해, 넌 지금 너무 지나친 희생을 하고있어!" 이 말을 듣자 스터드가 했던 말이 많은 사람을 영적 난장이로 만들었다고 합니다.그가 외치듯이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이 사실이라면! 내가 받아야 할 죄 값을 대신 받으시려고 죽으신 것이 참으로 사실이라면!! 내가 그를 위해 하는 어떤 일도 결코 지나친 희생이 될 수 없다!".
여러분도 이와 같이 고백하십니까?
예수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죄를 위해 죽으신 것을 사실로 믿으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일을 사실로써 믿으십니까?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내가 어떤 일을 한다해도 그 일이 결코 지나친 희생이 아니라고, 손해 보는 일이 아니라고 결코 헛되지 않은 일이라고 믿으십니까?
예! 라고 아멘 이라고 화답하신 분들은 복음을 아시는 분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일을 최근까지 해 보신 분들이실 것입니다. 왜냐면 그 일을 해 본 사람들만이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너희가 앎이니라"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고린도 성도들이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않는 가운데 주의 일을 넘치게 한다면  주님의 일이 결코 헛되지 아니하다는 사실을 자기 스스로 알게 될 것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이송오 목사님께서 연세대 거리설교를 마치고 돌아오실 때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을 하고 돌아간다고 고백을 하신다는 말을 들었는데 해본 사람들은 공감합니다.  
여러분은 복음을 아십니까? 복음을 아는 성도들의 삶이 어떠한 삶인지를 고후5;15절에서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산 자들이 이제부터는 더 이상 자신들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 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는 것이라.](고후5:15)
교회는 다니지만 구원을 받지 못한 채 있습니까?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면서도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습니까?
구원도 받았고 구원의 확신을 가졌다고 말하면서도 주님의 일을 앞에 두고 주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복음은 바로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복음을 단지 나를 구원케 했던 기쁜소식 정도로 알고 계시지는 않았습니까? 복음이 그 때만 필요했지 구원받은 이후로는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그럼 복음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2004년 한해를 어떻게 사시고자 계획을 세우셨습니까?
제가 드리는 새해의 비젼은 이것입니다.
{복음을 아는 성도로써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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