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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6월 2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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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죽으심을 기억하게 하기 위하여...
 관리자    | HIT : 7,779 |
주의 죽으심을 기억하하 하기 위하여...


{또 빵을 가지고 감사를 드린 후, 떼어 그들에게 주며 말씀하시기를 “이것이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나의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고 하시고 저녁 식사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말씀하시기를 “이 잔은 나의 피로 된 새 언약이니, 이는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것이라.} (눅22:19-20)


주님께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하시고 있는 때는 주님의 죽으심이 아주 가까이 와 있는 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있듯이 이 때는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 잡히시던 전날 밤이었습니다.
그러한 때에 주님은 자신의 죽으심이 어떤 형태로의 죽으심인지, 그리고 그 죽으심은 어떤 목적으로 죽으시는 죽음이신 지를 가르쳐 주시려고 빵과 잔을 가지고 말씀하셨습니다. 찢겨진 빵은 채찍을 맞으신 주님의 몸을, 붉은 포도주 잔은 그 몸에서 흘려진 피를 의미하는 것임을 미리 예시해 주고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같은 심각한 주님의 죽으심에 관한 말씀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주님을 잘 따른 결과로 주어지게 될 높은 지위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24절).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 내용을 보면 더 잘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설교를 통해서 볼 것은 왜 이 같은 대조적인 모습이 나타나고 있는지를 시작으로 해서 주의 만찬을 행하시는 주님의 의도하심을 볼 것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왜 주님께서 죽으실 것을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모순된 행동으로 자리다툼이나 하고 있느냐를 보겠습니다.
우리는 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알기 위해서 당시의 유대인들의 메시야신앙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당시의 유대교신앙에는 메시야의 죽음에 관한 가르침이 없었기 때문이 그 이유입니다.
여기서 유대교라 함은 바빌론 포로이후 '모세의 율법'을 근간으로 하여 새롭게 정립된 유대인의 종교를 말합니다.
우리가 구약의 역사를 볼 때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반복적으로 불순종함으로 결국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시리아로 B.C 721년에 사로잡혀갔고 남왕국 유다는 B.C 606년에 바벨론으로 넘어갔다가 이후 메데와 페르시아로, 다시 로마의 속국이 되어 종살이를 하는 상황가운데 놓이게 되었지요.
그런 상황에서 유대의 랍비들은 구약의 말씀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연구는 자기들의 처지와 바람에 맞게 해석하는 방식으로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말씀을 새롭게 신학적으로 체계화시켰는데 그래서 나온 신학체계가 유대교라는 신앙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이 유대교신앙은 구약의 말씀들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믿는 제대로 된 신앙이 아니라 여러 면에서 다른 믿음과 실행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중 절기를 지키는 문제라든지, 전통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 율법과 다른 실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자주 책망을 받았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뿐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메시야에 대한 신앙 또한 구약의 말씀과 달랐는데 그들은 메시야가 오면 왕국을 세우실 것인데 그 세우심에 있어서 전혀 고난이나 죽음과는 상관없는 방법으로 세우실 것으로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는 메시야는 그들의 신앙과 관계가 없었습니다.
때문에 메시야가 오면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풀어주는 것은 물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부족함 없이 공급하여 주심으로 풍성한 삶을 살게 될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보리 빵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셨을 때 사람들은 말하기를{“이분은 참으로 세상에 오셔야 할 그 선지자시라.”}(요 6: 14).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울을 보면 유대교가 어떤 종교인지를 알 수 있는데 그는 구약에 정통한 사람이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 그가 제대로 구약을 알고 있었다면 주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자신의 입으로도 직접 말하기를 구약의 율법은 예수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선생이었다고 갈3:24절에서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율법 안에 있지 않고 "유대교" 안에 있었기에 예수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합니다.{너희는 내가 유대교에 있었을 때의 내 행실을 들었거니와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몹시 박해하였으며 황폐시켰고 나의 동족 가운데 많은 동년배들보다도 유대교를 믿는 일에 앞서 있었으며 내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데 더욱더 열성을 내었느니라}(갈 1:13-14)고 말입니다.
이런 유대교사상에 젖어 있었던 상황이었기에 제자들도 메시야이신 주님의 죽으심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었던 것은 물론이고 설령 죽으실 것이라는 말씀을 오늘 본문처럼 하신다 하더라도 그런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베드로는 실재 그렇게 고백했었지요? 주님께서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을 때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이런 일이 결코 주께 있어서는 아니되옵니다." }

이런 당시의 신앙배경 때문에 주님께서 죽으실 것을 말씀하시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왕국의 자리에서 누가 주의 왼편과 오른편에 앉을 것인가로 다툼을 벌였던 것이고, 본문 뒤에 나오는 41절에서도 주님은 겟세마네에서 그처럼 고뇌에 찬 기도를, 그것도 그들로부터 돌을 던지면 닿을 만한 거리에서 하심에도 태평스럽게 잠을 청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그들의 모습들이 모순처럼 보여도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은 그 같은 주님의 죽으심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요 12: 34} [무리가 주께 대답하기를 “우리가 율법에서 듣기로는 그리스도가 영원히 산다고 하였는데 어찌하여 당신은 ‘인자가 들리워야 하리라.’고 말씀하시나이까? 이 인자는 누구니이까?”..]
이상이 본문에서 주님과 제자들 사이의 상반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이유인 것입니다.

그럼 두 번째로 주님은 왜 이런 상황에서 당신의 죽으심을 굳이 만찬식이라는 의식을 행하시면서 까지 제자들로 기억하게 하시느냐 하는 점을 보고자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십자가의 죽음에 숨겨진 음모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주님은 십자가에 의한 죽으심을 예시하는 주의 만찬식을 거행하시면서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숨겨진 음모가 무엇인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과연 주님께서 왜 부득이 십자가에 매달리는 죽음으로 죽임을 당하셔야 했는가에 대해서 질문을 드린다면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답변하시겠습니까?
모세의 놋뱀사건에 대한 예표이기 때문에?
유월절 양의 대한 예표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맞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유대종교지도자들의 음모가 가세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분명 예언과 계시된 예표의 성취를 이룬 것이 십자가였지만 그 성취를 이루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유대종교지도자들의 간계도 이용하셨다는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당시의 상황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함께 마26:3-4절을 읽겠습니다. 그리고 요11:47절을 읽겠습니다.

당시의 상황은 유대교의 종교지도자들, 즉 선임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을 제외한 거의 대다수의 백성들은 예수님을 참 선지자요 메시야로 알고 따르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믿지 않을 수 없는 분명한 많은 기적이 행해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기적들을 종교지도자들도 보았던 상황이라 부인 할 수 없었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들이 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무슨 수를 써서든지 예수님을 죽여야 했습니다
결국 그들이 고소꺼리로 찾은 것은 신성모독이었습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하여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자처했다는 것이 그들의 고소꺼리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율법에 따르면 신성모독죄를 지은 사람은 돌로 쳐서 죽이는 것이 그 처형방법이었으니 그렇게 했어야 하지요?
그런데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시도를 하긴 했었는데 이후에는 할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주님을 따랐기 때문에!
그래서 그들은 고민했고 교묘한 방책을 세웠으며 그 계획한 목적을 가지고 예수님을 로마의 법정에서 재판하게 하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려고 계략을 꾸몄던 것입니다. 물론 이 음모에는 예수님을 유월절 전에 처형하고자 하는 것이 주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죽일 것이냐 하는 것도 중요한 사항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빌라도가 심판해 줄 것을 부탁합니다.
그러나 빌라도가 고소내용을 보니 율법에 관한 문제라 빌라도는 말하길 "그를 데리고 가서 너희의 율법에 따라 재판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거짓말까지 해가며 말하기를 "우리가 누구를 사형에 처하는 것은 적법지 못하나이다." 라고 말합니다. 사실 그들은 이전에도 예수님을 돌로 쳐서 죽이려고 시도했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말이 거짓말인 것은 행7장에서 스테판을 돌로 쳐서 죽였던 것을 보면 분명해 집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고소하지만 받아들여질 것 같지 않자 그들은 예수님의 처형을 빌라도가 맡아서 처리하게 하기 위해 거짓고소를 합니다.
"이 자가 우리 민족을 현혹하고, 카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그리스도 인 왕이라고 하더이다."(눅23:2). 그러나 역시 거짓말일 뿐이지요.
예수님은 유대민족을 현혹하신 적도,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한 적도, 자신이 왕이라고 스스로 말씀하신 적도, 적어도 잡히시긴 전까지는 없으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고소한 것은 빌라도로 하여금 예수님을 처형하는 일에 관여하지 않고서는 안되도록 끌어들이려 했던 것입니다.

결국 빌라도는 유대민족을 로마가 통치하는 일에 있어서 예수님이 정치적인 중요한 사항들에 반역을 일으켰다고 고소하는 그들의 주장에 꼼짝없이 말려들고 맙니다.
결국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승낙하고 그들에게 넘겨줍니다.
그들의 의도대로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알고자 하는 것은 왜 굳이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고자 했냐는 것입니다.
돌로 쳐서 죽이지 않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지요?
앞서 보았던 것처럼 유대민족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따르던 상황이었습니다.
때문에 유대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믿는 대중들의 인기를 한번에 사그라뜨리고 동시에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믿는 믿음에서 끊어 놓을 수 교묘한 방법을 찾았다고 했는데 그 방법이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는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고 있던 유대교의 신앙에는 나무에 매달린 자는, 그냥 매달린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매달린 자라는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같은 사실이 율법에 있는 내용이었지요?
{나무에 매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신 21: 23).
그렇게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아 죽이게 되면 예수님을 따르던 이스라엘에게 예수님은 메시야가 아닌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은 자라는 것을 보이게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게 되면 종교지도자들은 "보라! 예수가 메시야냐? 메시야가 죽는다는 신앙이 우리에게 있느냐? 없다! 그러나 나무에 매달린 자는 저주받은 자라는 신앙은 있다. 그러므로 보라! 저가 메시야이면 왜 저렇게 나무에 달려 죽어야 하느냐?" 하고 말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실재 구약에서 나무에 매달려 죽은 자가 있었나 생각해 보았는데 있지요?
그 사람은 예수그리스도의 예표가 되는 다윗을 대적하여 반역을 일으켰던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었지요. 멸망의 아들로 예표가 됩니다. 그가 도망하다가 상수리나무 가지 사이에 매달려 죽음으로 하나님께 저주받아 죽은 죽음임을 성경은 알게 하고 있습니다. 또 에스더에 나오는 하만이 나무에 달려 죽었는데 그는 유대인들을 죽이고자 음모를 세웠더랬습니다. 그래서 모르드캐를 나무에 매달아 죽이고 유대민족을 멸하려고 했으나 하나님의 섭리적인 개입으로 자신이 나무에 매달려 죽는 저주를 당하게 되었지요.
이 같은 구약에 기록된 사항을 믿고 있었기에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들이 기대했던 것은 예수님이 죽은 것은 자기들이 죽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죽은 것이라는 사실을 당시 제자들과 예수님을 추종하던 군중들의 눈에 직접 보여 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예수님을 추종하던 유대인들의 믿음을 뒤집어엎고 이전처럼 자신들을 따르게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여러분들은 과연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다고 그들의 믿음이 바뀔 수 있을까 하겠지만 우리가 이미 기록된 말씀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자 어땠습니까?
제자들은 다 도망친 상태이고 후에는 아예 이전 직업으로 돌아가, 고기 잡으러 가기도 하고 엠마오로 향하던 제자들도 슬퍼하며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부활하셔서 그들에게 나타나셨던 주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24:17절에서{너희들이 걸으면서 슬픔에 잠겨 서로 주고받은 이 말들이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또한 주님이 부활하셨을 때 주님은 천사를 통해서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를 통해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려고 했지만 도무지 믿으려 들지 않았었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나타나지 않으셨다면 성경을 열어서 주님의 죽으심에 대해서 가르쳐 주시지 않으셨다면 그들은 각자 자기 길로 돌이켰을 것입니다.
그럼 유대종교지도자들의 계략은 확실한 성공을 거둔 것으로 결말이 났을 것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저주받은 자의 죽음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12:3절을 가만히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예수는 저주 받았다고 말하지 아니하며 또 성령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누구라도 예수를 주라고 말할 수 없느니라.]

그런데 우리가 구원의 진리를 알게 된 상황에서 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비록 유대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저주받은 자로 죽게 만들려고 십자가에 매달아 죽게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계략과 음모까지도 다 이용하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저주를 받으시고 죽으신 것이 그들의 의도대로 사실이 되었지만 그 저주는 다름 아닌 모든 사람들의 저주로 하나님께 대신 해서 받으셨다는 것이 신약을 이룬 새 언약이었던 것이지요.
갈3:13절{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셔서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구속하셨으니 기록되기를 “나무에 매달린 자는 누구나 저주받은 자라.”고 하였도다.} 우리는 이같은 하나님의 섭리와 악인들의 간계까지도 뛰어넘는 하나님의 지혜 앞에 바울과 같은 고백을 하게 됩니다. {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분의 심판을 어찌 헤아리며 그분의 지나간 길을 어찌 찾아내리요?}(롬 11: 33)
그리고 다윗처럼 노래하게 됩니다. {그들이 주께 대하여 악을 꾸몄으며, 간계를 계획하였으나 이를 시행하지 못하나이다.} (시 21: 11)
또한 솔로몬처럼 고백하게 됩니다.{사람의 마음이 자기의 길을 계획하나, 주께서 그의 걸음들을 인도하시느니라.}(잠 16: 9)
그리고 욥기 5: 13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현명한 자들로 그들의 간계에 빠지게 하시며 심술궂은 자의 계획이 거꾸로 수행되게 하시는도다.}  

이 같은 십자가 구원의 진리는 구약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예표로 등장하는 요셉에게서도 발견됩니다.
그는 자신을 죽이려고 계획했던 자신의 형제들!! 에게 후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창 50: 20 {당신들은 나에 대하여 악을 계획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계획하시어서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을 살도록 구원하시려 하셨으니...그러므로 내가 당신들과 당신의 어린것들을 양육하리이다.}놀랍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통해 알게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일은 막지 못하고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함께 행4:24-28절 읽겠습니다.
[그들이 그 말을 듣고 다같이 하나님께 음성을 높여 아뢰기를 “주여, 주께서는 하늘과 땅과 바다와 또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신 하나님이시니이다. 주의 종 다윗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셨으니 ‘어찌하여 이방이 분노하며 백성들이 헛된 일들을 꾀하는가? 땅의 왕들이 일어서고 또 치리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였도다.’라고 하셨나이다. 과연 주께서 기름부으신 주의 거룩하신 아들 예수를 대적하여 헤롯과 폰티오 빌라도가 이방인들과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모였으니 이는 주의 손과 주의 계획대로 이루기로 예정된 온갖 일을 행하려 함이니이다.]

자! 우리는 이 같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구원을 받고 계시된 신약성경이 있기에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이 같은 새언약에 관해서 무지했으니,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처럼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에 다시 한번 재차 그 죽으심의 의미와 목적을 가르쳐주실 필요가 분명히 있으셨던 것이지요.
게다가 유대교의 종교지도자들은 제자들까지도 혼동하도록 십자가에 죽게 함으로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라는 것을 확인시키고자 했는데 그러니 주님 편에서도 더더욱 당신의 죽으심을 가르치실 필요가 있으셨던 것이지요.
실재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 때 제자들은 무척 혼동스러웠을 것입니다.
어찌 그 같은 권능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왕국은 세우시지 못할망정 저주받은 자의 죽음으로 죽으셔야 했나?
혼란과 번민, 그리고 밀려드는 슬픔 가운데 통곡의 눈물을 흘립니다.
성경은 그들이 슬퍼하며 울더라고 막 16: 10절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멈추고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갑니다.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그들의 심정은 실로 많은 생각으로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분명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그들에게 말씀해주시지 않으셨더라면 그들은 영영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이 십자가의 죽음이 어떤 의미인지를 모르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날 오늘의 본문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기억하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기 원하셨습니다. 어떤 목적으로 죽으시는 죽으심이었는지 누구를 위해서 죽으시는 죽음이었는지를 기억하길 원하셨습니다.
혹여라도 제자들이 주님의 죽으심을 보고도 기억하지 못할까 싶으셔서 시청각교육까지 시키셨던 것이지요?
빵을 떼시고 포도주 잔을 주어 먹게 하시면서 가르치고자 하셨던 것이 그것이 아니었습니까? "제자들아~ 이 찢겨진 빵을 보거라 이 빵은 너희를 위하여 쪼개지는 나의 몸이란다. 그리고 이 붉은 포도주 잔을 보라!  너희의 죄들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새언약의 피란다. 내가 너희들과 이 음식으로 이런 일들을 행하는 목적은 너희가 나의 죽음의 의미를 기억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란다. 나의 죽음이 어떤 의미인지를 잊지 말고 기억하기 바란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적어도 주님이 잡히시던 유월절 날에 하셨던 이 말씀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사실 이전에도 간접적으로 말씀을 하셨었습니다.
"인자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생명을 몸값으로 주려고 온것이라."마20:28절
제자들은 이런 주님의 말씀들을  기억했어야 했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더라면, 주의해서 들었었더라면, 그들은 십자가에 달리셨던 주님의 찢져진 몸과 그 몸에서 흐르는 피를 바라보며 빵과 잔을 주시면서 하셨던 말씀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그 찢겨진 몸과 흘리신 피가 다름 아닌 자신들을 죄들을 사하시기 위해서 흘려졌던 새 언약의 피라는 것을 말입니다.
주님은 그 점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잊지 않게 하시려고 미리 말씀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상이 주의 만찬을 행하셔야만 했던 주님의 의도하심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이 같은 주의 만찬식은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지키는 신약교회의 의식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의식을 행하게 하신 주님의 의도를 우리는 모르지 않습니다.
무엇입니까? 제자들처럼 주님의 죽으심의 의미도 모르고 슬픔과 소망 없는 가운데 살지 않기를, 구원을 받고도 이전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지 않기를, 이전의 세상으로 돌아가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지 않기를, 헛된 것을 위해 살지 않기를 바래서이겠지요.  

여러분~ 우리에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기억하라고 직접적으로 명령으로 말씀하셨고 또 그 내용을 의식을 통해서 기억하게 하신 것은 정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십니다.
노예상인이었던 존 뉴튼은 임종 전에 고백합니다. "지금의 내 기억력은 형편없이 흐려졌지만 그럼에도 내가 기억하고 잊지 않고 있는 것은 나는 큰 죄인이라는 사실과 주님은 나의 큰 구원자라는 사실이다."

여러분은 주님의 죽으심을 잊지 않고 있습니까?
잊지 않고 계시다고 말하신다면 그 잊지 않음이 여러분이 처음에 주님의 죽으심을 알았을 때와 다르지 않은 잊지 않음입니까?
여러분이 처음 주님의 죽으심을 알게 되었던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그 때 여러분은 어떠했는지 말입니다. 분명 너무 기뻐서 가만히 있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에 눈물은 수시로 흘러나왔었을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주저하지 않았었을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일이나 성경을 공부하는 일이나 연보를 드리는 일에 인색하지 않았었을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의 마음은 부요했을 것입니다. 생활이 전과 달라진 것이 없는데도 여러분은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은 것처럼 넘치는 희열과 감격가운데 생활했었을 것입니다. 그 때 여러분의 마음은 여러분도 모르게 흥분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정녕 그랬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죽으심을 잊지 않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말씀하실 것입니다. 나는 주님의 죽으심을 잊지 않고 있다고! 어찌 잊을 수 있겠느냐고! 주님은 나의 죄를 위해 피 흘리셨지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잊지 않음이 과연 처음 주님의 죽으심을 알게 되었을 때의 앎과 같습니까? 다르다면 잊은 것입니다. 다른 만큼 잊으신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처음 그 때 만큼의 마음과, 그 때만큼의 열정과, 그 때만큼의 사랑과 섬김이 다른 모습으로 있다면 여러분은 그 때! 여러분이 주님의 죽으심을 처음 알았을 때 그 때의 그 주님을 잊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계시록 2장에 나오는 에베소교회가 주님의 죽으심을 정말 잊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들이 그처럼 칭찬들을 만한 일들을 많이 했는데 그들이 주님의 죽으심을 잊어버린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주님과의 첫사랑을 잊은 것이지 주님의 죽으심을 잊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주님이 하신 말씀은 "너를 책망할 것이 다소 있나니, 이는 네가 너의 첫사랑을 저버린 것 때문이라."

이제 저와 여러분은 주님께 책망 받을 것이 없는지 자신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내가 처음 주님의 죽으심을 알았을 때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다르지는 않은지, 다르게 되었다면 무엇 때문에 다르게 되었는지 우리 각자 돌아보기 원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물어보기 바랍니다. "내가 언제부터 이처럼 냉랭한 마음이 되었는지, 내가 왜 주님을 섬기는 일에 열정을 잃게 되었는지, 내가 무엇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일을 그만두게 되었는지, 어찌 내가 주님의 죽으심에 관한 설교를 듣는데도 마음에서 올라오는 무엇도 없고, 내 눈에서는 조금의 눈물도 흘려지지 않는 것인지, 과연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지, 하는 그 모든 것들을 기억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계 2: 5 그러므로 네가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기억하고 회개하며, 너는 처음 일들을 행하라. 만일 그렇지 않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속히 너에게 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세계전쟁이요? 대환란의 엄청난 고통이요? 아닙니다.
제일 무서운 것은 성도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잊는 것입니다.
구원을 별거 아닌 것으로 가치 없는 싸구려로 여기는 것입니다.
"구원은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거니까, 받는데 어렵지 않으니까, 공짜니까, 이미 받았으니까, 그러면서 대단치 않게 여기며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그 것처럼 무섭고 있을 수 없는 일도 있을까요?
그것보다 더 무섭고 있을 수 없는 일은 없다라고 저는 감히 말씀드립니다.

오늘 우리는 주의 만찬을 실행합니다.
교회가 주의 만찬을 통해서 주님의 죽으심을 새삼 기억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 앞에 나의 모습을 돌아보고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 무뎌진 나의 감각들을 새롭게 하고, 섬김에 바르지 못했던 나의 실행들을 바로 잡는 마음가짐을 주의 만찬을 행함으로,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게 됨으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 기억을 되찾은 성도는 고백합니다. "나는 주님의 귀한 보혈이 흘려짐으로 살게 되었구나! 나는 주님이 싫어하는 죄를 짖고 살면 안 되는 사람이 되었구나! 나는 내가 하고 싶은데로 막살면 안 되는 사람이 되었구나! 나는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아야 되겠구나! 하는 것들을 다짐하게 됩니다. 그러한 다짐들이 저와 여러분의 다짐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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