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 오늘의 명언 :::
(2021년 06월 21일 )
독립이 자유롭게 사는 조건이라면 여자는 결혼해서는 안된다.(자멘 그리어)
::: 협력 사역 :::




믿음이 발휘되어야 할 때
 관리자    | HIT : 5,805 |
믿음이 발휘되어야 할 때

본문: 창22:1-2

아브라함의 믿음은 참으로 위대하고 놀라운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아브라함의 믿음을 볼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누구인지 잘 모르는 분이 계실지라도 그가 불리는 호칭을 들어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금방 알수 있습니다. 그는 믿음의 조상이라 불립니다.
갈 3:7 그러므로 너희는 믿음으로 난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알라.
아브라함은 유대인의 조상만이 아니라 우리들, 즉 믿음으로 난 사람들의 조상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은 우리와 공통점이 있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믿음이 의로 여겨져 의인이라 불린 사람입니다.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더니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 4:3)
[이제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고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롭다고 여김을 받을 우리들 때문이기도 하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그분을 믿는 자들이라.](롬4:23-24)
그처럼 신약성도들도 믿음이 의로 여겨져 의인이 된 사람들인 것이지요.
여기에서 말하는 믿음은 행함이 없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행함으로 믿음을 입증했는데 성경은 말씀하시길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렸을 때, 그가 행함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아니하였느냐?](약 2: 21)
그처럼 신약성도들도 믿음을 입증하며 살아야 함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고후 13: 5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스스로 입증하라.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여기서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행함이 있는 믿음을 말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야고보서 2장의 말씀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함이 있는 믿음을 우리 삶에서 입증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믿음으로 사는 삶이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누구라도 나와 같은 처지에 있게 된다면 다 똑 같을거야!
이런 상황에선 믿음을 가질래야 가질 수 가 없어!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믿음을 가질 수 있고 또 믿는다고 달라지겠어! 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언제 발휘되어야 하는 것이 믿음이겠습니까?
우리는 믿음에 관해서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믿음이 무엇인지 배워야 합니다. 어디에서 배울 수 있겠습니까?
아무래도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에게서 배운다면 확실히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배울 때 가능하다면 최고의 대가에게서 배우려고 합니다. 그래서 학생들 같은 경우에는 학문을 배울 때 가능하면 유명대학에서, 유능한 강사에게 배우고 싶어합니다. 왜냐하면 제대로 배우기 위해서이지요.
또한 무술을 연마하는 사람들도 그럴 것이고, 기술을 배우려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배우되, 최고의 고수에게로 가서 배우려 합니다.
그처럼 우리도 믿음이 무엇인지, 믿음으로 사는 삶이 과연 무엇인지를 제대로 배우기 위해선 믿음의 대가에게로 가서 배워야 하는데 그가 다름 아닌 아브라함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신약성경에서 소개되지만 아브라함 앞에서는 사실상 명함을 내밀지 못할 만큼 믿음에 관한 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오늘 아브라함의 믿음을 잠시 엿보면서 우리의 믿음을 점검하고 믿음으로 난 저와 여러분들이 앞으로도 참된 믿음으로 살아가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창12장에서 볼 수 있지만, 그러나 12장에는 행함이 없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삶이 입증되기 위해선 반드시 행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아브라함아~ 목적은 시험하시려고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믿음으로 입증되기 위해선 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시험하시는 것은 마귀가 하는 것처럼 넘어뜨리기 위함이 아니라 연단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아브라함은 대답했습니다. "보소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아들, 곧 네가 사랑하는 네 독자 이삭을 이제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서, 산들 중에서 내가 네게 알려 줄 한 산에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세 가지로 나누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가 받은 시험 첫 번째는 독자인 이삭을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청천벽력과 같은 시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삭을 바치라 하십니다. 이삭이 누구입니까? 아브라함이 백세의 노령에 얻은 아이였지 않습니까? 늦둥이가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럽습니까? 나이 오십에 아들을 얻었어도 그 아이를 금이야 옥이야 하며 키우지 않습니까? 그 아들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이가 아닙니까? 그 아들이 태어났을 때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젖을 뗄 때는 잔치를 벌였다고 21:8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사랑스런 아들이었으면 그랬겠습니까? 아닌게 아니라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사랑스런 아들이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도 아셨기에 말씀하실 때도 "네 아들, 곧 네가 사랑하는 네 독자 이삭" 이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런 아들을 바치라십니다. 그것도 하나밖에 없는 독자입니다. 둘이라도 된다면 까짓 것 눈 딱 감고 바치겠건만 어떻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바치라 하십니까?
그런데 그뿐이 아닙니다. 이삭이 누구입니까?
약속의 씨가 아닙니까? 창1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자식을 주겠다, 그리고 그 자식으로부터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나올 것이다." 그 자식이 이삭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제 와서 그를 바치라 하시는 것입니다. 즉 죽이라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일 이삭을 죽이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많은 자손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아브라함은 이삭을 통해서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을 믿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을 죽이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죽이는 일 자체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지만, 죽인다 해도 문제가 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딜레마이지요?
그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아들을 죽이면 나의 자손들은 어디서 나오나? 하나님은 이삭을 통해서 약속을 하셨는데? 그리고 내가 이 아이를 죽인다면 과연 나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인가?" 그러면서 하나님께 따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십니까? 과연 저에 대한 계획이 있기는 있는 겁니까? 저더러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충분히 그렇게 항변하고 생각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이런 상황이 과연 믿음을 발휘할 수 있는 상황입니까?
그런데 시험은 이 정도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시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두 번째 시험은 모리야에 있는 산으로 가서 바치라는 것입니다.
산 넘어 산입니다. 정말 백보 양보해서 아들 이삭을 죽인다고 하자 이겁니다. 눈 딱 감고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당장 순식간에 죽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리야 땅에 있는 한 산으로 가서 죽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곳까지의 길은 무려 삼일 길입니다. 삼일길이 거리가 멀어서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 삼일동안 자기 아들 이삭과 함께 먹고 자고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자기 손으로 죽여야 하는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과 말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상황에 놓인다면 어떨까요? 미치고도 남을 일이겠지요?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과 함께 해야 할 삼일간의 여정은 세상에서 말하는 그 고상한 이별여행이 아닙니다. 요즘 문제가 되는 동반자살도 아닙니다. 자기는 살고 아들만 죽이는 그 일을 위한 여정입니다. 하나님께는 하루가 천년과 같다고 하셨는데 지금의 아브라함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아브라함의 시험은 시련을 동반한 시험입니다. 그것도 불같은 시련 말입니다. 그의 마음은 불붙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 마귀는 가만히 있지 않겠지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행하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속삭이겠지요? 이렇게 속삭일 것입니다.
"여보게나 아브라함, 저기서 자고 있는 자네 아들을 봐, 너무도 평안해 보이는군, 내일이면 자기 아버지가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것도 모르고 말이야, 아브라함, 잘 봐, 자네 아들이야, 사랑하는 자네 아들이란 말일세, 젖을 떼던 날에는 기뻐서 동네 잔치도 벌였었지! 이삭이 태어나던 날은 기억나나? 기쁨의 눈물을 흘리던 그때를 말이야! 저 아이는 자네가 무릎에 앉고 키운 아이라구, 자라면서 재롱부리던 모습,기억나나? 너무 이뻣었지! 그런데 말이야, 그런 아들을 자네가 죽일 수 있다고? 오, 자네 언제부터 그렇게 잔인해 졌나? 그리고 생각해봐! 그렇게 죽이라 하신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란 말인가? 자네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가는 하나님이 자네가 믿는 하나님인가? 그리고 저 아들이 죽으면 자네 후손은 어디서 나오겠나? 하나님은 저 아이에게서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고 하시지 않았나? 자네가 이제 와서 또 다른 아이를 낳을 수 있을 것 같은가?" 충분히 이런 속삭임이 들려오겠지요?

아브라함은 이전에 창12장에서는 하나님의 말씀만 믿고 자신의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난 사람입니다. 그때만 해도 어디로 가야 한다는 목적이나 왜 가야 하는지 목표도 없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신뢰하는 믿음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은 다릅니다.
아들을 죽이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갑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 모리야 산으로 가야하는 아브라함에게는 차라리 전처럼 목적지도 모른 채, 왜 가야하는지도 모른 채 가는 것이 더 낳았을 것입니다. 가는 목적이 아들을 죽이러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목적지는 모리야 땅이고 거리는 삼일 길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두 번째 시험입니다. 아브라함의 이런 상황이 과연 믿음을 발휘할 수 있는 상황입니까?
그런데 그의 시험은 이 정도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시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 번째 시험은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산 넘어 산 넘어 이제는 태산을 만났습니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죽이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그것도 삼일 길을 가서, 그것도 그냥 깨끗하게 약을 먹여 죽이는 것도 아니고, 무슨 벼랑으로 떨어뜨려 죽이는 것도 아니고, 번제로 드리래요!
레위기를 읽어보신 분들은 번제가 어떻게 드려지는 제사인지 알 것입니다.
번제는 번제 제물인 소나, 양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떠야 하며, 그 피는 제단 위 사면에 뿌려져야 합니다. 내장과 잘려진 다리는 물로 잘 씻어 제단 위에서 불살라 드려야 했습니다. 소나 양이나 새는 그렇게 할 수 있다지만, 사람을 죽여서 각을 뜬다고 상상해보십시오. 이처럼 끔찍한 일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이쯤 되면 믿음이고 뭐고 다 내팽개칠 만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믿음을 내팽개칠 만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지금 인신제사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 하나님께서 인간제물을 받으신 적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그런 요구를 하신 적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인신제사는 이방의 우상숭배자들이나 했던 제사였습니다.
구약에 보면 몰렉에게 제사를 지내는 기록들이 나옵니다.
그 제사의 특징은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고 불가운데 넣는 것입니다.
마귀적인 제사인 것이지요?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이쯤에서 확신을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나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말했던 분은 하나님이 아니었다.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사람을 제물로 바치라고 할 수 있겠는가? 분명 나에게 들렸던 음성은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라 마귀의 음성이었다! 에잇, 사탄아 물러가라!" 그러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이삭과 함께 내려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음성이 마귀의 음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순종하고 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순종하고 믿음으로 실행해야 했습니다. 칼을 들고 목을 따고 각을 뜨고 내장을 뜯어내어...
그런 생각하다가 "에이, 하나님, 도저히 못하겠습니다. 이게 뭡니까? 하나님 혹시 배교하신 것 아닙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저에게 이런 일을 시키십니까? 난 못합니다." 하고 돌아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자, 과연 아브라함의 이 같은 상황이 믿음을 발휘할 수 있는 상황입니까?
전혀 믿음을 발휘해야 할 상황이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무엇하나 믿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 같아 보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이나 성품과는 정반대 되는 요구들로 채워진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럼에도 믿음을 발휘하여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란 것이 그런 때 발휘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냉정히 말해서 우리의 삶이 평탄하고 아무런 문제도 없을 때 믿음은 발휘되지 않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의 눈으로 보기에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 같고, 이해도 안되고, 그래서 그런 상황에선 믿음을 가져야 할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하고는 하나님의 섭리가운데서 벗어나고 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다면 그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아브라함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그는 이해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냥 믿음으로 모든 일을 행할 뿐입니다.
행하고 나서도 하나님의 섭리는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지 않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요구하셨는지!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지요?

아브라함이 했던 일은 훗날 하나님께서 하실일이었던 것이지요!
신약을 이루시는 일, 즉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화목제물로 바칠 일에 대한 모형적인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버지 하나님을, 그리고 이삭은 예수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여러분은 아브라함이 한 일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과 일치하는 것을 보십니까?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바쳤습니다.
이 말씀과 일치하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 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사랑하는 아들"이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께도 예수님은 그러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그 안에서 내가 기뻐하노라.”(마 3:17).
아브라함의 믿음은 자신의 외아들을 아끼지 않고 드림으로서 확증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신의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내어줌으로서 확증되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그의 사랑을 나타내셨느니라](롬 5:8).
우리는 본문에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순종하여 피 흘려 제물이 되려는 이삭에게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나무를 지고 산을 오르는 이삭의 모습에서,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산으로 향하는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칼 앞에서 잠잠했던 이삭의 모습은, 병정들의 창칼 앞에서 잠잠했던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등에 지고 산을 오를 만큼 장성한 아들 이삭이 아버지가 자신을 묶고 칼을 들어 죽이려 할 때까지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고 입을 열지 않는 순종의 모습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아무런 반항도, 입을 열지도 않았던 모습을 봅니다.
또한 모리야 산까지 가던 사흘 길의 악몽 같은 날들은 예수님께서 땅의 심장인 지옥에서 사흘 낮 밤을 계셨던 그 참담했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음에서 구해내심으로 집을 떠난 지 사흘만에 다시 살게 된 모습에서 우리는 장사된 지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아십니까? 이삭이 제물로 드려지던 그 장소가 정확히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셔야 했던 갈보리 산이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대하 3:1절을 보면 모리야가 예루살렘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모리야에 있는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 산은 예언적으로나 상징적으로나 갈보리 산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본문에서도 아브라함은 그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8절에서! 바로 이 장소에서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제물이 되셨던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이처럼 하나님의 구속사역이 다 성취되어진 일을 보고 있기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하라고 하신 일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는 것을 알지만요, 아브라함은 우리가 보는 것처럼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냥 하나님을 믿고 믿음으로 행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가 믿음으로 행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11:17-19)에서는 이 때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믿음으로 ...이로써 그는 모형으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받은 것이니라.” 예,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이삭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무엇을 믿었다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해 씨를 번성케 하실 것을 믿었는데, 그 이삭을 죽이실 지라도, 다시 살리실 수 있다고 믿는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보여지는 모든 상황들이 전혀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하고 그래서 믿음을 발휘할 만한 상황이 아닌 것 같았음에도 실행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십니까? 믿음이 무엇인지 보십니까?
믿음이란 보여지는 형편과 처지가 어렵다 해도, 아니 그럴 때 발휘되어야 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셔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습니까?
우리가 보건데 하나님은 이삭을 원했던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원하셨습니다.
다름 아닌 아브라함의 믿음을 원하셨습니다.
그는 훌륭하게 믿음으로 시험을 이겨냈고 과연 믿음의 조상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위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어떻게 그런 믿음을 발휘할 수 있었나요?
다름이 아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안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영원하신 하나님"로 알았습니다.(21:33) 읽고!
그리고 "전능한 하나님"로 알았습니다(17:1) 읽고!
그래서 그는 아들이 죽어도 다시 살리실 수 있는 하나님으로 믿은 것입니다.
그에게는 부활신앙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설명할 수 없고, 이해 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 여러분이 아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영원하신 하나님이 아닙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닙니까? 여러분에게도 부활신앙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아브라함과 달라야 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동일한 믿음으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무기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랬듯이 하나님을 향한 전적 신뢰로 여러분 앞에 있게될 여러 시험들에서 능히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이제 여러분은 적어도 이런 말씀은 못하실 것입니다.
내가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은 알지만, 내 처지가 되어 보라고! 나 같은 처지에서 믿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뭐 하나 제대로 갖춰져야 믿음으로 살던지 할 것이 아니냐고! 지금 나에게 있어 믿음은 사치일뿐이라고!" 하는 등의 말들 말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이유를 앞세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앞에는 아브라함 같은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뚀한 우리 인생 앞에는 적어도 아브라함이 받았던 시험과 견줄만한 시험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은 시험에서 승리하는 믿음입니다.
발휘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발휘되어지는 그런 믿음 말입니다.
그런 믿음이 과연 어떻게 발휘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면 됩니다.
허드슨테일러는 승리하는 믿음의 삶을 살려면 이렇게 외치라고 했습니다.
"뒤돌아보면서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외치라!(이는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말이라), 그리고 앞을 내다보면서 여호와 이레를 외치라,(이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다는 뜻이라) 그리고 항상 임마누엘을 외치라(이는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말이니) 이렇게 외치기만 한다면, 두려움 없이, 만나는 시험마다 다 통과하고 승리할 수 있다"라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처럼 말입니다.
  
31 비밀글입니다  test  섬김이 20·12·19 34
30   설교는 유튜브에서 들으세요~  섬김이 19·03·14 325
29   [칼럼] 환경과 믿음의 관계  관리자 07·04·26 7999
28   [칼럼] 지식과 믿음과의 관계  관리자 07·03·14 8243
  믿음이 발휘되어야 할 때  관리자 07·01·27 5805
26   주의 죽으심을 기억하게 하기 위하여...  관리자 05·04·27 7779
25   주께서 오실 세상 끝의 표적  관리자 05·03·31 7889
24    경주 자이십니까?  관리자 04·09·23 5733
23   [칼럼] 나는 지금이 왜 "라오디케아" 시대라고 믿는가?  관리자 04·07·05 4972
22   가족을 돌아 보라  관리자 04·06·08 6573
21    성경적 자녀 양육법  관리자 04·05·05 7240
20    왜 주님을 따라야 합니까?  관리자 04·04·22 5574
19    지옥에 간 부자를 기억하라  관리자 04·04·22 6558
18    보시기에 아주 좋았더라  관리자 04·04·02 5649
17    보혈을 통한 구속  관리자 04·02·25 5638
16    주의 은혜로  관리자 04·02·15 6522
15    의인은 믿음으로 ..  관리자 04·02·08 5143
14    복음, 누구를 위한 것인가?  관리자 04·01·22 4869
13    고난의 동참자가 되라  관리자 04·01·22 5309
12   내가...하리라!  관리자 04·01·11 4743
1 [2]
Copyright 1999-2021 Zeroboard / skin by GGAMBO
 

Copyrightⓒ2003 광주성경침례교회 All Right Reserved.
문의 전화: 062-943-1994 , 010-3623-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