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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명언 :::
(2021년 07월 26일 )
많은 사람이 충고를 받지만, 오직 현명한 자만이 충고의 덕을 본다.(푸블릴리우스 시루스)
::: 협력 사역 :::




의의 병기로 드리라
 관리자    | HIT : 4,438 |

  롬 6:11~20

  우리는 세상에서 가끔 “범죄와의 전쟁”이라는 말을 듣곤 합니다. 이 말은 1990년에 당시 대통령이  사용한 이래로 지금까지 계속  사용되고 있는 말입니다. 그만큼 범죄가 사회의 큰 문제꺼리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말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도 기본적으로 죄를 싸워서 이겨야 하는 대상으로 알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죄와의 싸움을 전쟁이라고까지 표현한 것을 보면 자연인들도 죄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인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쟁에는 반드시 승패가 주어집니다. 승리하면 살고 패배하면 죽게 됩니다. 이 승패의 결과는 육신 뿐만 아니라 영의 생명도 살고 죽는 문제로 나타납니다. 죄에게 패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 말 그대로 육의 죽음을 맞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성도가 죄에게 패배하면 그의 영적생명은 죽게됩니다. 영적생명이 죄의 결과로 죽게 되면 살아있어도 죽은 것입니다(딤전 5:6). 이처럼 죽고 사는 문제이기 때문에 ‘전쟁’이라고 표현한 것은 매우 옳은 표현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이 죄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순간순간 죄의 유혹을 이겨서 승리했다 해도 결국 최후에는 패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승리를 힘입지 않는 이상 패배는 정해진 것입니다. 반면 그리스도인은 최후의 승리가 보장된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가 곧 우리의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승리의 기반 위해서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죄와의 싸움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닙니다. 최후의 승리는 보장되어 있지만 거기에도달하기까지 매일매일 치러야하는 죄와의 전쟁은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승리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생사가 걸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영적 생명의 삶과 죽음! 그것은 죄와의 싸움의 결과에 달려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전혀 무익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육의 생명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중요한 영적인 생명을 위해 죄와 싸워 이겨야 합니다. 영적인 생명의 승패에 따라 육의 생명 또한 좌우되기 때문에 영적인 생명이 더 우선시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죄에게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죄에게 죽는 것’입니다. 죽은 것으로 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도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죽으려고 하는 자는 살 것이요 살려고 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마도 성경에서 지혜를 얻어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바로 죽는 것이 사는 것이요, 승리의 비결입니다.
본문 11절 [죄에게는 죽은 자요] 성경 여러 곳에서 죄를 의인화해서 기록하고 있는 구절을 볼 수 있습니다. 창 4:7 [죄의 욕망이 네게 있으니 너는 죄를 다스릴 지니라], 본문 12절 [죄가 너희 죽을 몸 안에서 “군림하지” 못하게 하여,,,  “죄에게 순종하지 말고”]
죄를 의인화한 표현을 통해 우리가 싸워야할 대상이 ‘죄’임을 알게됩니다.  
<죄와 싸우는 성도의 대화 >
죄: 이봐, 저길 봐! 정말 멋있지 않아! 가봐, 가서 해봐! 멋질 거야!
성도: 나는 죽었어!
죄: 아니야, 너는 살아있어! 봐! 그러니 한번만 해봐! 한 번쯤인데 어때!
성도: 아니, 사양하겠어! 나는 죽었어!
죄: 아니라니까! 네가 죽었다면 어떻게 나와 대화할 수 있겠어!
성도: 그래, 난 살아있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대해서만 살라고 하셨지, 너같은 죄에 대해서도 살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어! 난 너에 대해 죽었어!
빌리 선데이는  “나는 죄와 죽을 때까지 싸우겠다. 내 손이 잘리면 발로 차고 발이 잘리면 이빨로 물어뜯고, 이빨이 부러지면 머리로 받아서라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죄와 싸우겠다”고 말했습니다.
히 12:4 [너희가 죄와 맞서서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않았]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와는 싸워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의 특성을 알아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작은 죄를 용납하게 되면 그뒤에는 반드시 큰 죄가 기다리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죄는 처음에는 매력있게 다가오고, 즐겁고 , 기쁨을 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죄를 수용하게 되면 빈번하게, 습관적으로, 만성적으로 그 죄가운데 거하게됩니다. 그리고 그죄는 개전의 여지없이 완고해지고, 더욱 완강해지며, 결코 돌이키지 않기로 결심하고 마침내는 파멸로 이끕니다. 죄는 범할때의 달콤함에 비해 그 결과로 인한  고통은 몇갑절 더 큰 것입니다.
죄는 처음에는 나그네가 되어 다가오지만 그대로 놓아두면 집주인이 되고 맙니다.
처음에는 여자처럼 약하지만 내버려두면 남자처럼 강해지는 것이 또한 죄입니다.
처음에는 거미줄처럼 가늘지만 나중에는 배를 묶는 밧줄처럼 강해지는 것이 죄입니다.
  죄의 성질이 어떠한 것인지 에스키모의 늑대 사냥법을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에스키모인들은 전통적으로 다음과 같이 늑대사냥을 한다고 합니다. 그들은 날카로운 칼날을 세워놓고 칼날에 피를 발라 얼립니다. 피가 얼면 그위에 다시 피를 발라 얼리고... 칼날이 뒤덮일때까지 이작업을 계속합니다. 다음은 그칼을 하늘을 향해 세워서 땅에 고정시킵니다. 이제 늑대가 예민한 코로 냄새의 근원인 미끼를 찾아오고 늑대는 얼어 있는 신선한 피맛을 보며 그것을 핥기 시작합니다. 녀석은 더빨리 더맹열히 핥기 시작하여 드디어 날카로운 칼날이 보이기까지 핥게 됩니다. 그러나 녀석은 식욕이 너무 강한 나머지 날카로운 칼끝을 핥고 있다는 것을 모르게 됩니다. 그뿐 아나라 자기의 혀에서 흐르는 피로 자기의 배를 채우고 있다는 것조차 모른채 계속 핥습니다. 녀석은 얼마후 현기증을 느끼고 피흘리며 서있다가 마침내 쓰러져서 시체로 변하게 됩니다. 죄는 이처럼 핏덩이로 겹겹이 포장된 칼날과 같습니다. 한번 맛을 보면 쉽게 끊지를 못합니다.
  죄는 한번 지으면 또다른 죄로 그죄를 덮을 수밖에 없는 것이기에 필연적으로 죄가 죄를 낳게 됩니다.  거짓말을 한번하면 그거짓말을 덮기위해 또다른 거짓말을 하게되는 것을 여러분도 경험해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거짓말이 나중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겉잡을 수 없을 정도가 됩니다. 내가 죄에게 무릎을 꿇는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합니다. 내가 죄를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죄가 나를 죽이므로  죽여야 할 대상을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왕상 20:31-43에는 이 교훈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완전한 멸망으로 정해 놓은 원수를  살려주는 아합의 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합은 전쟁에서 패한 시리아의 왕 벤하닷을 “나의 형제”라고 부르며 따뜻하게 대해주고, 자신의 병거에까지 태웠습니다. 이에 벤하닷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빼앗은 이스라엘의 성읍들을 돌려주겠다고 말하며, 다마스커스에는 아합을 위한 거리를 만들어도 좋다고 말합니다(31-34). 그러자 아합이 벤하닷과 언약을 맺고 그냥 돌려보냅니다. 이죄로 인해 선지자의 아들들 중 한사람이 어떤 사람에게 자기를 치라고 말하고는 상처를 입은 채 아합을 기다립니다(35-38). 그는 아합이 지나가자 왕에게 소리쳐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전쟁터에서 자신에게 어떤 사람을 지키라고 맡기고 갔는데, 만일 그를 놓치면 자신의 목숨이나 은 한 달란트를 내놓아야 한다고 했는데 그만 자기가 놓치고 말았다고 설명합니다. 이에 아합은 “네 스스로 그것을 결정하였으니 네 판단대로 될지니라”고 판결했습니다.
그러자 선지자가 얼굴에서 재를 제거하고 나서 말하기를, “ 주가 말하노라 내가 완전한 멸망으로 정해 놓은 사람을 네 손으로 놓아주었으니 네 목숨으로 그의 목숨을 대신하고, 네 백성으로 그의 백성을 대신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39-43).
아합은 하나님께서 죽이라고 명령하신 그 대상을 살려준  댓가로 자신이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말씀을 받게 됩니다. 이 말씀은 본문 말씀과 연관해서 우리에게 커다란 영적교훈을 줍니다.
주님께서 죽은 것으로 여기라고, 죽이라고 하신 육신을 죽이지 않고 육신을 따라 산다면 반드시 우리는 영육간의 총체적인 죽음을 맞게될 것입니다. (21절!!)
  우리의 싸움은 죽여야할 대상을 죽임으로 승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싸워야할 대상과 죽여야할 대상을 분명히 구분해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죽여야할 육신은 죽이지 않고 육신의 힘으로 죄와 싸우려한다면 마귀는 자신이 할 일이 없음을 알고 상대조차 하지않을 것입니다. 이말은 결코 긍정적인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제 죄와 어떻게 싸워야할지 아셨을 것입니다. 죄에게 죽은자가 되면 승리하는 것입니다.
내 육신을, 내 정욕을 죽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때문에 바울은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시키노라]는 비장한 말로 고백하고 있는데 우리도 이처럼 비장한 각오와 함께 우리의 몸을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그 복종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면 죄에게 순종하는 사람이 되는데(12절) 그러면 그의 몸은 불의의 병기가 되고(13절), 그의 혼은 죄의 종으로(16절), 불법의 종으로(19절) 전락하게 됩니다. 동시에 의의 병기로, 의의 종이 되어 하나님께 드리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13절 [또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내어 주지 말고, 다만 너희 자신을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난 자처럼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는 말씀에서 분명 우리의 몸은 어디에든지 속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불의의 병기로 죄에 내어주는 것이 아니면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 우리의 몸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무에게도 드려지지 않는 몸이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순간도 역시 우리는 둘 중의 하나에 드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의의 병기로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드려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는 이유는 달콤하게 찾아온 죄에게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죄를 향해 소리치지 않았고, 죄를 다스리라는 명령에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한 근본적인 이유는 그 죄를 범하고 싶은 원함이 자기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말은 육신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죽었다면 그 죄에 반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죽었다고 여기라는 말씀에 불순종한 것이고, 싸워야할 죄에게 순종한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까? 죄에게 순종하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16절을 다시 보십시요! 누구에게 순종하든 순종하는 자의 종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죄의 종이든 하나님의 종이든, 불의의 병기든 의의 병기든 둘중 하나에 속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죄와의 싸움에서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이겼다면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하나님께 의의 병기로 드려져야 합니다. 바로 이것을 위해 싸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성도를 사용하십니다.  거룩이란  따로 떼어놓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성도가 거룩한 성도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을 보면 큰집에는 금과 은, 나무와 진흙으로 만든 많은 그릇이 있는데 주인은 그 중에서 깨끗한 그릇을 사용합니다.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성도만이 깨끗한 그릇이 되어 주인에게 사용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본문은 성도가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해서 죄와 싸워승리해야만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성도가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서는 죄로부터 승리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범죄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 돌이킬 수 있는데 반드시 돌이켜야 합니다. 자신이 스스로 죄로부터 승리하고 성결하게 하여 하나님께로 돌이키겠다는 것은 마귀에게 속은자의 고백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본문은 돌이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의 병기로 쓰임받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점을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부분을 본문 19절에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원받기 전에 부정과 불법에 자신의 몸을 내어준 ‘것처럼’ 이제는 의로운 일에 자신의 몸을 드리라는 말입니다. 주인만 바꾸라는 것입니다. 마귀에게서 하나님께로!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후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으면 마귀가 쳐놓은 두번째 덫에 걸려들게 됩니다. 반드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합당한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로마서 12: 2절을 보십시오. [합당한 예배니라]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합당한 일입니다.
우리의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전 6:19~20 [또한,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바 너희 안에 계신 성령의 전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니라. 너희는 값을 치르고 산 것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의 것인 너희 몸과 너희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어떤 성도의 삶에 초조함이 있고 평안이 없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한 상태로 살고있기 때문입니다. 남의 물건을 훔친 사람이 그 물건의 주인을 만나면 그 마음이 초조하고 평안도 없겠지요. 이같은 상태가 헌신하지 않은 성도의 상태인 것입니다. “나와 하나님 사이에 완고한 죄의 그림자를 드리우고는 결코 평안히 살 수가 없다.”고 엘리옷은 말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것을 도둑질한 상태로 살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 드려야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무엇이 합당한 일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원자로 받아들이는 것이 합당한 일입니다.
딤전 1:15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이 말씀은 신실하며, 온전히 받아들이기에 합당하도다.]
주님은 우리의 찬양과 존귀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계 4:11 ["오 주여, 주께서는 영광과 존귀와 권세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니, 이는 주께서 만물을 창조하셨고,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으며, 또 창조되었기 때문이니이다."라고 하더라.]
계 5:12 [큰 음성으로 말하기를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권세와 부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도다."라고 하더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원자로 받아들이는 일과 구원받은 성도가 그분께 영광과 찬송을 돌려 드리는 일이 합당하며, 마땅히 행해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 또한 합당하여 마땅히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든 마땅히 해야할 일을 하지 않으면 반드시, 마땅히 하지 말아야할 일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땅히 성도는 죄와 싸워 이겨야하고, 이겼으면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마땅히 해야할 그 일을 하지 않으면 그것은 죄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성경은 선을 행할줄 알면서 하지 않는 그 사람에게는 그것이 죄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했지만 하나님께 드리는 일 앞에서 멈추게 되면 그는 죄에게 승리했다고 말할 수 없으며, 마귀에게 다시 속게된 것이고, 패배하게된 것입니다.
교회에 변화가 없고 진보가 없다면 그것은 교회의 회원들이 마땅히 해야할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마땅히’라는 단어가 사용된 용례를 보겠습니다. (신 4:2) 하나님이 말씀을 삭제, 첨가하는 것은 마땅히 해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마 24:15) 멸망의 가증한 것이  마땅히 서지 못할 곳에 서는 것을 보게될 것입니다. (행 5:29)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죄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마땅히 받아들여야 할것입니다.
자신의 몸을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주는 것보다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마땅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결론
 우리의 몸은 의의 병기로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목사이며 사회사업가인 조지 뮬러는 일생을 고아를 위해 헌신하였으며,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말년에 그는 어떻게 평생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겸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조지 뮐러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즉 평판,선택,좋은 것과 싫은 것,원망 등에 대해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이세상의 칭찬이나 비난에도 죽었습니다. 제가 두려워했던 것은 하나님의 책망이었고 제가 원했던 것은 하나님의 칭찬이었습니다. 그러자 인생이 저도 모르게 달라졌습니다.”
예수께서 육체를 입고 이땅에 오심은 죄에 매여 종노릇하며 사망의 열매를 맺던 우리들에게 영생을 주시고 영생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길을 여시기 위함입니다.
육체의 정욕을 따르고 세상과 세상의 조류, 유행과 문화를 따르는 삶은 불의의 병기로 사용되는 삶이지만 육체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것은 의의 병기로 드려진 삶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의의 병기로 드려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께 합당한 삶을 살아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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