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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명언 :::
(2021년 07월 26일 )
많은 사람이 충고를 받지만, 오직 현명한 자만이 충고의 덕을 본다.(푸블릴리우스 시루스)
::: 협력 사역 :::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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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빌 3:4~11                


  (빌 3:4) [나도 육신을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군가가 육신을 신뢰할 만한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더욱 그러하니라.]
바울은 출생에서부터 시작하여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훌륭한 삶을 살았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육신을 신뢰할 만한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더욱 그러하’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육신 안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기에 육신을 신뢰하는 어리석은 자에게 그의 어리석음에 따라 답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잠 26:5). 바울은 육신을 신뢰하고 있는 사람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한 육신적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5~6절에서 그 이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빌 3:5,6) [나는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인이며,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에 의하면 바리새인이라. 열성으로 말한다면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 말한다면 흠이 없음이라].
그는 출생 뿐 아니라 행실에 있어서도 그의 동료들보다 훨씬 뛰어났습니다(갈 1:13~14). 그런데 다음 절(7)에서 바울은 ‘그러나’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이력을 모두 지워버립니다. (빌 3:7) [그러나 나에게 유익하던 것은 무엇이나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손실로 여겼느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손실로 여겼느니라”](7절)는 말씀은 자신의 육신적인 배경들은 그리스도를 얻으려는데 손해가 되는 것들, 장애가 되는 것들이므로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 그것들을 잃어버렸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출생이나 행실을 후회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과거의 이력이 그리스도를 얻지 못하게 했다는 의미로 손실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바울의 그 훌륭한(?) 배경들은 오히려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게 했던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많이 배웠기에, 부유하기에, 권력층에 있기에 그리스도가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한, 돈도 없고 뒷배경도 없고 능력 없는 사람에게나 필요하다고 여깁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도를 비웃고, 모든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능력이 있는 복음을 어리석은 것이나 하찮은 것으로 여깁니다. 그들의 문제는 신뢰할게 못되는 것들을 신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8절에서 다시 한번 강조하여 말합니다. (빌 3:8) [실로 모든 것을 손실로 여김은 그리스도 예수 나의 주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며,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것들을 오히려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함이요]. 손실로 여길 뿐 아니라 오히려 배설물로까지 여긴다고 고백합니다. 그것들은 쓰레기를 넘어서 똥(dung)이라고까지 표현합니다. 그러나 어떤 고상한(?)사람들은 이런 표현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기록된 단어를 다른 단어로 대체합니다. ASV, RV, RSV, NEB, 리빙레터즈..등은 ‘쓰레기’, ‘찌꺼기’ 또는 ‘개의 음식(dog's meat)’, 그리고 앞에 나온 단어와 맞추어 ‘손실(loss)’로 변개시켰습니다. 이들은 여전히 ‘모든 것’(8절)에 어느 정도의 미련이 남아 있는 사람들이기에 그렇게 바꾸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모든 것’에 전혀 미련을 두지 않고 배설물로 여기고 있습니다. 쓰레기나 찌꺼기는 ‘배설물’보다는 더 고상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조금도 고상하게 표현해서는 안됩니다. 그 고상해 보이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 수 없게 만드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안다면 무엇 때문에 거기에 손을 대 좀더 고상한(?) 표현으로 바꾸려고 하겠습니까? 이러한 열매로 볼때 성경을 변개시키는 자들은 구원받지 않았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 어떤 것보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말합니다. 불교나 유교, 이슬람이나 그 어떤 종교도 ‘창시자를 아는 지식’을 가장 고상하게 여기고 ‘창시자를 아는 지식의 고상함’을 열망하지는 않습니다. 심지어 이것은 로마 카톨릭이나 자유주의 개신교들에서도 볼 수 없는 내용인 것입니다. 오직 성경대로 믿는 교회에서만 고백되어지는 내용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고백하십니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라고 말입니다. 이 지식에 비하면 내가 전에 자랑하던 것들은 배설물과 같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여기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자랑하던 것들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게 했다면 그래서 그것들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게 되었다면 그 때에도 그것들이 “그래도 어느 정도는 고상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그 모든 것들은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알 수 없게 만드는, 손실(손해)을 보게 만드는 것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후에도 여전히 고백되어져야 합니다. 여전히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보다 다른 어떤 것이 더 고상하고 신뢰할만한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알 수 없게 만드는 요인인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말하다가 그리스도 자신으로 말합니다. 지식은 말씀을 말하는데 말씀이 곧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말씀은 하나님이십니다. 호 4:6에서 [내 백성이 지식의 부족으로 멸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거부하였으므로 나도 또한 너를 거부하리니, 네가 나에게 제사장이 되지 못하리라.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또한 네 자녀를 잊어버리리라.] 이스라엘이 지식을 버렸으므로 거부하겠다고 말씀하심으로 지식과 하나님을 동일시하십니다. 그리고 다음에 지식은 율법으로 말해집니다. 동일한 말씀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요, 지식을 거부하는 것 또한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라는 말이 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거부하면 그리스도를 잃어버립니다. 물론 구원을 잃어버린다는 말은 아닙니다. 말씀을 거부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조명을 비춰주지 않으시고 성령은 소멸하십니다. 그러면 그는 늘 어두움 가운데서 행하게 되고 주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한 채, 삶의 짐으로 어깨는 짓눌린 채, 홀로 고독한 길을 걷게 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알고 있습니까? 어떻게,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성경에서 ‘안다’는 말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창 4:1) [아담이 자기 아내 이브를 알았더니 그녀가 임신하여 카인을 낳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알았더니(knew-know) 문맥상 성관계를 의미함을 알 수 있습니다. 킹제임스성경의 영향을 받아서 사전에 know의 뜻에 ‘성교하다’는 의미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NIV는 ‘lay(눕히다)’로 바꾸어 ‘아담이 아내 이브를 눕히더니 카인을 낳았다’로 성관계를 의미한다는 것을 더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옳은 번역이 될 수 는 없습니다. 개역성경은 동침하다는 말로 번역하였는데 역시나 성령께서 의도하신 뜻을 드러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안다’는 말을 사용할 때는 성관계만을 의미하지 않고 그 이상의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친밀한 경험을 통해서 이루어진 관계를 나타낼 때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 1:10) [그가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에 의하여 지은 바 되었으나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더라]. (요 15: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들이라 부르지 아니하리라. 이는 종은 자기 주인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내가 너희를 친구들이라고 불렀으니, 이는 내가 내 아버지께로부터 들은 모든 것들을 너희에게 알게 하였기 때문이라]. 분명 종보다 친구가 더 친밀한 관계임을 압니다. (요일 3: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리게 하셨는가.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나니 이는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
이처럼 친밀한 관계가 성립되었을 때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전에 한번 인사를 나누었던 사람을 “나는 저 사람을 알지” 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전에 한번 만났었지”라고 말하지요! 성경은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일 2:3~4) [만일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분을 알고 있음을 아는 것이요 “나는 그분을 아노라”하면서 그의 계명들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쟁이니, 진리가 그 사람 안에 있지 아니하니라].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그렇다면 그의 계명을 지킴으로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왜 그리스도를 만나 구원 받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으로 전락하는 것입니까? 자신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장 고상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다른 무엇을 더 우위에 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호세아는 그 행위를 그리스도를 버린 행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를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일시적인 내버려두심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주 예수그리스도와 관계가 없기 때문에 보호와 축복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평생의 소원이 무엇이었을까요? 복음을 전파하는 것? 세계적인 선교사가 되는 것? 교회성장을 이루는 것? 물론 그런 소원이 있었지만 그것은 그런 사역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바울의 행적에서 부분적으로 취해 사용함으로 그렇게 보일 뿐 진정 바울이 소원한 것은 ‘그리스도를 알기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소원은 그리스도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였습니다. 바울이 다마스커스 도상에서 주님을 만났을 때 그의 첫 질문은 “주여 당신은 누구시니이까?”(행 9:5)였습니다. 그가 구약에 약속된 그리스도를 만나자 마자 가졌던 갈망은 주님을 알기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알고 그분의 형상과 일치하는 것을 바라십니다. (롬 8:29) [그 분께서는 미리 아신 자들을 자기 아들의 형상과 일치하게 하시려고 또한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를 많은 형제 가운데서 첫 태생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바울은 이것을 알았기에 10절에서 [내가 그를 알고 그의 부활의 능력과 그의 고난의 교제를 알기] 원한다고 고백합니다. 또한 주님처럼 부활도 경험하길 원했습니다(11절). 그래서 죽기를 주저하지 않고 죽을 일이 있으면 오히려 그 일을 원했던 것입니다. 11절의 [어떻게 해서든지]라는 말씀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든지 주님을 알기 원했습니다. 그 일이 그리스도를 알 수 있게 해줄 수 있는 것이라면 그 상황을 오히려 더 원했습니다. 돌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고, 헤아릴 수 없는 매와 사십에 하나 뺀 매를 다섯 번이나 맞기도 하고 여러번 감옥에 갇히고, 하루 밤낮을 바다 속에서 보내기도 하고,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으로부터의 위험과 이방인들로부터의 위험과 성읍에서의 위험과 광야에서의 위험과 바다에서의 위험과 거짓 형제들 가운데서의 위험을 당하기도 했던 일들을 피하지 않았던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고통이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이었기에! 그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었기에! 고난의 교제를 나누는 것이었기에! 고통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서 어떠한 고통도 감수하길 원하십니까? 여러분이 현재 붙잡고 있는 것들을 버림으로써 그리스도를 더 잘 알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을 버리기를 마다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지금보다 더 가난하게 되어 단한번의 외식도 할 수 없고, 좋다고 하는 명소에 가보지 못하는, 아니 그보다 더하여 세끼의 밥조차 먹기 힘든 궁핍한 생활을 하게 되더라도 그 상황이 그리스도를 더 잘 알 수 있게 해준다면 그 길을 가기를 마다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여러분 앞에 남은 인생을 호의호식하면서 살 수 있는 길과 단 하루를 거지처럼 살다 죽을 수밖에 없지만 거기에는 그리스도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비결이 있다면 여러분은 어느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누군가가 나에게 그리스도를 알 수 있게 해주는 희미한 빛이나마 비춰줄 수 있다면 나는 그의 모든 허물과 실수를 용서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자기에게 그리스도를 단편적인 지식으로 가르쳐 알게 하는 것이 아닌, 그 자신이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배운 그리스도를 소개해 줄 수 있다면 그의 허물과 죄들도 용납하고 용서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그리스도를 경험하고 자신에게 소개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허물은 그가 알고 있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언제고 바로잡힐 수 있기 때문에 자신도 용서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도 이 점을 알고 있었기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용납할 수 있었습니다. (엡 4:2) [모든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골 3:13) [만일 어떤 사람이 누구에게 불평이 있으면 서로 용납하고 서로 용서하기를 마치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그리하라].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즉 그리스도를 더 알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아깝지 않다고 고백합니다(8절).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지식이 그 무엇보다 더 고상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고상하다'는 말은 ‘견줄 것이 없는 가장 위대하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알 수 있는 길보다는 더 멀어지는 길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를 아는 진리의 지식은 버리고 자기 멋대로 감정에 취해 드리는 경배를 통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멀어지려고 합니다. 변개된 성서로는 항상 배워도 결코 진리의 지식에는 이를 수 없는데도 역사와 전통을 내세우며 바른 성경을 거부합니다. 또한 많은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알 수 있는 쉬운 길이 있는데도 가지 않으려 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를 아는데서 좀 멀어질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그 속내를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오늘 예배드리지 못할 어떤 상황이 생겼으면 하지만 그 일을 의도적으로 꾸밀 수는 없기에 그런 상황이 나의 선택과 상관없이 이루어졌으면! 그래서 그런 상황은 내가 결정한 것이 아니었다고 말하면서 이런 상황에선 예배를 드릴 수 없다며 자기 정당화하는 가운데 예배를 쉬고 싶어 합니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아합니다. 어떻게 하면 지역교회를 떠나볼까 합니다. 내 남편의 직장발령으로! 내 아이의 교육문제로 이사해서! 나의 믿지 않는 아내(남편)가 교회 가는 것을 싫어해서! 가정의 평화가 깨질까봐! 갖가지 이유로 그리스도를 알기 원하는 길에서 멀어지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예배를 드리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고! 나는 지역교회를 떠나고 싶지 않다고” 말은 합니다.
  여러분은 교회는 왜 나오는 것입니까? 그리스도를 더 알고 싶어서가 아닙니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런데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기를 원치 않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그들이 지식을 거부함으로 나도 그들을 거부하리라. 그들이 지식이 부족함으로 멸망의 길로 가는 구나!” 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누구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귀한 분이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자신이 붙잡고 있는 고상해 보이는 것들을 손실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 주님을 알고자 하는 일에도 열심을 내지 않는 것입니다. 때문에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실로 모든 것을 손실로 여김은 그리스도 예수 나의 주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8절 상반절)이라며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어떠한 것인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위하여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을 손실로 여길 수밖에 없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손실로 여기지 않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 지식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앎을 뜻합니다. 이는 인격적인 교제를 통하여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주님을 알아 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의 것들이나 혹은 자신에게 속한 것들에 매여 있게 되면 주님을 알아 가는 신앙의 과정에는 심각한 손실이 발생합니다. 바울은 이 점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을 올바로, 그리고 풍성히 알고자 하는데 장애가 되는 것들을 버리기로 했던 것입니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아는데 방해가 되는 것들을 살펴보니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들이 거기에 해당됨을 발견하여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리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 중 괜찮을 듯싶은 한가지만이라도 붙들고 있다가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니 망설일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손실로 여긴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리스도를 알 수만 있다면 죽음 마저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서 어떤 희생을 치르고 있습니까? 더 알고자하는 원함은 있습니까? 얼마나 주님을 알고자 원하십니까? 나는 그 분을 알고 있기에 더 알 무엇도 없다고 말씀하십니까? 그렇다면 그것이 여러분에게 어떤 열매를 맺게 해주고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으로 계십니까? 이 점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어 우리도 바울과 같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그 어떤 것보다 더 고상한 지식이라, 그리스도를 알기 위하여 내 어떤 것도 희생하리라 고백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우리 신앙은 신진대사가 잘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람은 먹고, 먹은 것을 배설물로 잘 내보낼 수 있어야 건강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러분도 새로운 것만을 먹겠다고 하지 말고 필요 없는 육신의 자랑들을, 영적성장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고 과감히 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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