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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명언 :::
(2021년 07월 26일 )
많은 사람이 충고를 받지만, 오직 현명한 자만이 충고의 덕을 본다.(푸블릴리우스 시루스)
::: 협력 사역 :::




본향을 향한 순례자
 관리자    | HIT : 4,941 |
                            
  히 11:13-16
  우리나라는 명절 때마다 인구의 반 이상이 자신의 고향으로 대이동을 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개중에는 그냥 고향이 싫어서 떠난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 여러 형태의 갖가지 이유로 고향을 떠납니다. 그렇게 떠났다가 돌아갈 기회, 즉 추석이나 설날이 되면 고향을 찾아갑니다. 이렇게 돌아갈 기회가 있고, 찾아갈 고향이 있는 사람들은 그나마 행복하다 할 수 있습니다. 북녘에 고향을 둔 실향민들은 고향은 있지만, 돌아갈 기회가 있어 가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길이 막혀 갈 수 없는 형편에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아브라함과 자신을 타국인이요, 순례자라고 고백했던 사람들은 돌아갈 고향이 있었고 돌아갈 기회도 있었지만 돌아가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실로 떠나온 고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되돌아갈 기회가 있었겠지만](히 11:15). 그들이 사모하는 곳은 더 좋은 본향, 곧 하늘에 있는 한 도성이기 때문에 떠나온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은 것입니다. [이제 그들이 사모하는 곳은 더 좋은 본향,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히 11:16).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나와 광야를 지날 때, 수차례에 걸쳐 이집트로 돌아가자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고기 솥 옆에 앉아 있던 때와 빵을 배불리 먹던 때...](출 16:3)를 그리워하면서 말입니다. 그들은  어떤 구실만 있으면 계속해서 이집트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오늘날의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기회만 있으면  세상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때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말은 구원받기 전의 자신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인데 지옥에 가도 좋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왜 이런 말을 합니까?  본문 말씀처럼 떠나온 고향을 생각하며 그리워했기 때문입니다. 떠나온 고향이 어디입니까? 세상입니다. 세상에서 즐겼던 오락, 향락들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내 멋대로 하고 싶은 것 다하고  즐기던 그 때와 지금을 비교해 보니 지금은 하지 말라는 것도, 하라는 것도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투정이 생기고 불만이 생깁니다. 손해 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돌아가고자 합니다.  실제로 떠나온 세상을 그리워하다가 돌아갈 어떤 기회가 생기자 돌아가버린 많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데마도 세상을 생각했고 나아가 사랑해서 세상으로 돌아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 불렸던 많은 사람들! 그들은 더 좋은 본향보다 고향인 세상을 더 사모했기에 그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여러분은 본향을 사모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떠나온 세상을 더 사모하고 있습니까?
  본문은 본향을 고향과 비교해서 [더 좋은 본향](히 11:16)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세상으로 돌아간 성도들은 더 좋은 본향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좋지 못한 고향을 사모한 것입니까? 우리가 고향과 본향에 대한 차이를 분명히 알고 있다면 떠나온 고향인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본향인 하늘나라를 약속받았지만  아직 그 약속한 것을 받지는 않은 사람들입니다.  이제 곧 받게 될 것입니다. 본향은 내가 원한다고 해서 지금 즉시로 도착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지금 누리고 싶다고 누릴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내 아버지 집에는 많은 저택들이 있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리라. 나는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마련하러 가노라.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내가 있는 그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 요14:2~3)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아직 이 저택에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그곳에 들어가려고 기다리고 있고,  그동안 본향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복을 더 풍성히 하기 위해서 일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들은 모두 믿음 안에서 죽었으나 모두가 그 약속들을 받은 것은 아니로되 멀리서 그것들을 보았고 확신하여 소중히 간직하였으며, 또 이 땅 위에서 타국인이요 순례자라고 고백하였느니라](히 11:13). 앞선 많은 믿음의 선배들도 이처럼 약속은 받았지만 약속한 것을 받지 않은 채 우리가 사는 동일한 이 땅위에서 살았습니다. 우리도 ‘약속’과 ‘약속을 받은 것’을 구분하여 분명히 알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면 약속에 대한 믿음을 확신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소홀히 여기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본향에서 누릴 영화를 위해 일할 힘을 잃어 낙심하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으로 향하게 됩니다. 당장 뭔가 주어지지 않으니까, 당장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게 채워지지 않기 때문에 세상으로 돌아갑니다. (이러한 심리를 이용한 자들이 은사주의 자들입니다! 거짓 표적과 이적으로 쇼를 하는 자들입니다!) 고향(세상)은 즉시로 얼굴만 돌리면 주어지는 곳입니다. 원하기만 하면 즉시로 도달할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곳이 세상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본향이 훨씬 더 좋지만 고향(세상)으로 사람들의 마음이 기우는 것입니다.
  한 선교사가 선교지인 아프리카에서 여러 해 동안 열정을 쏟았음에도 불구하고 열매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오는 배에는 아프리카 사냥 여행에서 돌아오는 미국 대통령이 타고 있었습니다. 배가 샌프란시스코 항에 도착하자 예포소리와 함께 대통령을 맞이하는 군중이 부두에 나와 있었습니다. 대통령이 배에서 내려올 때 붉은 주단이 깔렸고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을 맞이했습니다. 대통령이 지나가자 붉은 주단은 걷히고 군악대의 나팔소리도 멎었습니다. 선교사는 그 뒤를 홀로 고독하게 내려오며 "사냥 다녀오는 대통령은 저렇게 환영 받는데, 큰 아들과 둘째 아들 그리고 아내마저 잃으며 선교를 하다가 돌아오는 나를 맞이하는 환영객은 아무도 없구나"라고 중얼거렸습니다. 고독감과 실패감을 느끼면서 정신없이 거리를 걷고 있을 때였습니다.  한 음성이 그에게 들려왔습니다. "내 아들아! 너는 아직 네 고향에 돌아오지 않았다. 네가 고향에 돌아오는 날 군악대의 나팔 소리가 아니라 하늘의 천군 천사의 나팔 소리와 함께 내가 맞이해 주마. 붉은 주단이 아니라 황금으로 길을 깔고 내가 친히 너를 마중 나오마. 사랑하는 아들아 끝까지 신실하라!"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고귀한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그 푯대를 향해 좇아갈 뿐이라"](빌 3:14)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으므로 우리가 그곳으로부터 오실 구주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으니](빌 3:20)라고 말입니다.

  본문에 언급된 믿음 안에서 죽은 많은 사람들이 약속을 소중히 간직하며 살 수 있었던 것은 이 땅에 정착해서 살 사람으로 잠시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 땅에서 ‘타국인이요 순례자’라고 고백하며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헷의 자손들에게 ["나는 타국인이요 당신들 가운데 기거하는 자니...“](창 23:4)라고 말했습니다. 야곱도 이같은 고백을 했습니다. [야곱이 파라오에게 말하기를 "내 순례길 세월이 일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생애의 세월이 짧고 험악하였으나 내 조상들의 순례의 날들, 곧 그들의 생애의 세월에는 미치지 못하였나이다"](창 47:9). 이스라엘의 왕인 다윗도 [나의 모든 조상들이 그러하였듯이 나도 주께 타국인이 되고 체류자가 되었기 때문이니이다](시 39:12)라고 고백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레 25:23에서 [...너희는 타국인이요 나와 함께 체류하는 자들임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하나님 자신도 이 땅에서는 잠시 체류하는 순례자와 같은 분이라고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여우들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인자는 자기 머리 둘 곳조차 없노라."고 하시니라](마 8:20). 주님께서는 이 땅에서 잠시 머물다 가실 분이셨기에 사역하시는 기간동안 집도 필요치 않으셨습니다.
  여러분도 이 땅위에서의 삶이 타국인이요, 순례자의 삶이라 고백하십니까?
사도 베드로는 벧전 2:11에서 우리가 그런 사람이라고 이미 못 박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타국인 같고 순례자 같은 너희에게 권고하노니 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신의 정욕들을 멀리하라]. 이러한 믿음의 고백이 분명치 않으면 언제고 돌아갈 기회만 주어지면 세상으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돌아갈 기회는 언제입니까? 하나님 없이도 하는 일이계획대로 순탄히 진행되어가는 것같이 보여 질 때! 박해도 고난도 없다가 세상에서 성취하고 싶은 일이 생길 때! 반대로 박해가 너무 심해서 피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 이런 때에 자신이 타국인이요 순례자라는 사실을 잊으면 세상으로 돌아가는 일은 시간문제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상하리 만치 쉽게 세상으로 돌아갑니다. 그동안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 확신들은 물거품처럼 공중으로 날아가 버리고 이전의 생활로 돌아가 버립니다. 어찌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처럼 보이지만 인간에게 있는 회기 본능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았기에 그곳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본능이 계속 일어나는 것입니다. 염전에서 일하는 어떤 사람이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실수로 소금 가마니를 바닷물 빠뜨렸습니다. 재빨리 건진다고 건졌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소금은 다 녹고 가마니만 남았습니다. 애써 만든 소금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없어진 것입니다. 평범한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하나의 영적 원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소금은 민물이나 수돗물에는 잘 녹지 않습니다. 그런데 소금이 취해졌던 바닷물에 들어가면 금방 융화되어 녹아 버립니다. 이처럼 세상에서 취해진 성도가 너무도 쉽고 빠르게 세상으로 돌아가 버리는 반면 하나님의 본성에 동참자가 되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다는 원리를 알게 됩니다.
  ‘내가 아는 진리가 어떤 것인데! 내가 세상으로 그렇게 쉽게 돌아갈 것 같은가!’라고 생각 하십니까? 함께 믿음의 걸음을 시작했던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현재 우리 주위에 없지 않습니까? 이처럼 성도가 세상으로 돌아가는 일은 무척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 말씀의 물로 세상의 때를 씻어내는 작업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시 119편에는 ‘말씀’이 구절마다 나옵니다. 19절에는 [나는 땅에서 타국인이오니 주의 계명들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54절에는 [주의 규례들은 내 순례의 집에서 나의 노래들이 되었나이다], 105절에는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우리의 순례길에 필요한 것은 ‘말씀‘입니다. 말씀의 물로 세상의 먼지를 지속적으로 씻어내지 않으면 세상에 융화되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앞서간 믿음의 선배들에게 돌아갈 고향이 있었고, 돌아갈 기회가 있었지만 돌아가지 않고 본향을 사모하면서 살수 있었던 것은 잠시 후면 이 땅을 떠날 타국인이요 순례자라는 고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망각할 때 이전의 삶으로, 예수그리스도와 약혼하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려고 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칠십이 훨씬 넘은 노부부가 도저히 더 못살겠다고  이혼하겠다며 담임목사를 찾아왔습니다. 목사는 "앞으로 사실 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그냥 사시지 뭘 그러십니까?"라며 설득하였습니다. 그러자 노부부는 "얼마 안 남았기 때문에 남은 시간이라도 제대로 살아야겠습니다. 이 사람과의 생활이 지긋지긋해서, 이제라도 이혼하고 제대로 살아야겠습니다."라고 답하였습니다. 목사는 그 부부에게 한마디씩 물어 보았습니다. “할머니(할아버지)! 할머니(할아버지)께서 그렇게도 싫어하시는 할아버지(할머니)께서  한 달 후에 죽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그러면 할머니(할아버지)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노부부는 "이제껏 살아왔는데 보기 싫어도 한 달 동안 이 영감(할멈)과 살아줘야겠지요." 하였습니다. 그러자 목사는 마지막으로 "그래요? 그렇다면 딱 한 달만 더 같이 사세요" 라고 상담해 주었습니다.  결국 노부부는 위기를 넘기고 잘 살아갔습니다.
  성도가 더 좋은 본향인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을 사모하며 바라지 않고 세상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은 마치 이 땅에서 오래오래 살 것처럼, 민요의 가사처럼 한 오백년 살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한 달 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 한다면 세상으로 돌아가려고 하겠습니까? 과연 누가 몇 년이라는 시간과 영원이라는 시간을 바꾸려 하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이야 세상밖에 모르기에 세상에 묻혀서 산다지만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하늘시민이 무엇 때문에 세상으로 돌아가려 한단 말입니까?

  이쯤에서 우리는 ‘고향’이라는 단어 사용의 용례를 바꾸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명절이면 찾고, 볼일이 있어서 찾는 그런 고향이 아닌 참 고향 말입니다. ‘어머님이 계신 곳이 고향’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말에 따라서도 더더욱 우리의 고향은 새 예루살렘이 되어야 합니다. 갈 4:26에서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로우니 우리 모두의 어머니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고향에는 가족들이 있습니다. 마 12:50에서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그 사람이 나의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에 하늘에 있는 본향이 우리의 고향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부모들은 아들이 고향에 돌아올 때 금의환향하기를 원합니다. 그처럼 주님께서도 달란트의 비유를 통하여 본향에 돌아올 때의 모습을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본향에 돌아갈 때 한 달란트 이상을 남겨  칭찬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묻어둔 달란트로 인해 책망 받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본향 가는 길은 이런 의미에서 고향 가는 길과 같습니다. 이제 더 이상 우리의 고향은 세상이 아니라 본향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고향 갈 준비를 하듯이 본향 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본향으로 돌아갈 날은 추석이 아닌 겨울이 지나고 비가 그친 뒤 꽃들이 피고 새들이 지저귀는 6월경 유대인의 명절로 오순절 때가 될 것입니다. 내년이 될 수 있고 그 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본향에 돌아갈 날을 사모하며 소망하고 있습니까?  본향에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잊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돌아갈 본향이 있다는 것과 그 날이 머지  않았음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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