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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개혁과 참 기독교 신앙 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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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개혁과 참 기독교 신앙 Ⅰ

금년은(1995년) 마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그(Wittenberg) 카톨릭 성당 대문에 95개 조항의 비리와 부패 사항을 못박은지 만 478년이 되는 해이다. 당시 세상은 완전히 카톨릭 교회의 지배하에 있어 정치와 사회 체계가 교회 국가(Church-State) 형태 속에 있었다.

자연히 교황과 그의 체제는 막강한 권세를 누리며 아무도 그를 대적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이었다. 그런 시대적 상황에서 그들의 부정과 부패는 한계를 넘은 지 오래 되었고 어떤 수술로도 치유가 불가능할 때였는데 마틴 루터가 그들의 부정을 공개적으로 지적하고 대적하였던 것이다. 한 마디로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성령으로 충만한 그리스도인은 담대함이 그 특징이다. 이런 행동은 중국 공산주의 정권에 대항했던 천안문의 중국 청년들의 용기보다 더 강렬한 용기였다. 이승만 독재에 항거했던 이 나라의 청년들, 박정희 유신정권에 항거했던 젊은이들, 전두환, 노태우 군사정권에 저항했던 이 땅의 젊은이들보다 훨씬 용기 있는 일이었다. 루터는 자신이 한 알의 썩은 밀알이 되겠다는 신념과 주님만을 의뢰하는 믿음으로 거대한 붉은 용에게 대항했던 것이다.

그때 이후로 478년 동안 성경의 진리는 얼마만큼 확산되어 뿌리가 내렸으며 개신 교회들은 그 진리를 얼마만큼 실행하고 있는가? 오늘날 이 나라 개신 교회들은 성경대로 실행하는 지역교회라고 자부할 수 있는가? 만일 없다면 그 무엇이 문제인가? 생각을 지닌 교역자들은 개혁을 자주 외치고 있는데 그 개혁은 어떻게 이룩할 수 있는가?

왜 주님은 교회를 원하셨으며 성경대로 실행하지 않는 교회들의 존재는 그리스도 앞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어떤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로마 카톨릭 교회에 의해서 그처럼 많은 피를 흘리고 죽어야 했는가? 그런 순교자들이 목숨과 바꾼 것은 무엇이었는가? 당신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인가? 그렇다면 그 분의 계명들을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당신은 그 분의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인가?

1. 개혁 주도자의 한계

마틴 루터의 로마 카톨릭에 대한 도전이 없었더라면 세계는 로마 카톨릭의 썩은 교리에서 숨도 돌리지 못하고 질식하고 말았을 것이다. 존 칼빈의 개혁의 기치가 없었다면 세계는 거대한 로마 카톨릭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틴 루터가 로마 카톨릭에 도전한 첫 번째 인물이고 그의 행동이 첫 번째 저항이었는가? 아니다. 초대 교회 이래로 성경대로 믿는 저항 세력은 계속 상존해 왔었다.

지금 교회와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교회사는 로마 카톨릭 교회와 친카톨릭 교회들이 신약 교회로 등장하여 마치 하나님의 교회인 것처럼 소개되고 있다. 무지한 사람들은 그런 교회사에 등장한 교회들을 참 하나님의 교회로 알고 있다. 그 당시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이 그런 교회들의 부정과 비성경적 교리의 실천에 대해 비판했을 때 이들 제도교회는 그들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갖가지 고문과 악행을 저지르며 공민권을 박탈하고, 화형으로 죽이고, 다른 방법으로 처형했던 것이다.

그 당시의 성경대로 믿는 모임들의 간증과 믿음의 실상이 세상에 알려질 길이 없었던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다. 그래도 폭스(Foxe)의 순교사와 하나님이 지켜 주신 사람들의 손길에 의하여 세기를 거쳐오면서 관심있는 성도들의 귀에까지 전해져 알게 된 것이다.

신학이라는 학문은 신비로운 학문이다. 문외한들이 볼 때는 신학을 학문으로 공부한 사람이면 성경을 많이 알고 깊이 있게 알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신학은 하나님에 관해 공부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이 신학을 공부하는 자세는 일반 학문을 공부하는 자세에 앞서 선행되어야 할 몇 가지 요건이 있는 것이다. 이 요건이 결여된 사람이 신학을 공부하게 되면 하나님의 깊은 것들(고전 2:10)을 깨닫지 못한다.

이 요건의 첫 번째는 바른 하나님의 말씀이다. 올바른 신학은 바른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출발한다. 신학의 교과서인 성경이 삭제되고 변개되었는데 그 성경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바르게 깨달을 수 있겠는가?

루터는 그 당시 이 점을 가장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1517년 루터가 카톨릭 교회의 비성경적 실행들을 만천하에 고한 후 제일 먼저 착수했던 일은 바른 원문에서 성경을 번역하는 일이었다. 루터의 종교개혁 성경은 희랍어 표준원문 계열에서 번역되어 1536년 독일어로 출간되었다. 바른 성경이 없이 바른 교리가 정립되고 바른 신앙이 자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썩은 물에서 물고기가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사람과 같다.

둘째, 신학은 복음으로 거듭난 사람이 공부해야 한다.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못한 사람이 마치 영이 살아난 사람처럼 행세하게 되면 본인은 물론 그가 속한 교회, 교제권, 가정 모두에게 피해를 주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성령으로부터 어떤 교시도 받을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가 얼마만큼 열성을 부리고 선을 행하고, 인내하고 절제한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종교 행위에 불과하다. 육신적인 생각은 하나님과 적대 관계에 있을 뿐이다.

그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한다고 착각할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런 것을 복종이라고 수용하시지 않기 때문이다(롬 8:7,8).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것은 물론이요, 하나님이 그 사람 안에 역사하지 않으시므로 그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행할지는 몰라도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신학에 있어 문제되는 또 하나는 성경대로 믿지 않고 패를 짜서 안주하려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성경으로 교리를 정립하고 준수하는 대신 어떤 공회나 선언이나 신조나 "믿음의 원칙"들 만을 내세워 모임을 만들고, 그 모임의 강점들을 내세워 우위를 주장하려 한다. 그들이 내세우는 것은 교단과 교파와 신학교들인데, 예를 들면 "장자 교단", 칼빈주의, 인가난 신학교, 웨슬리파, 오순절 교회,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 근본주의, 복음주의, 교회협의회 등이다.

이들은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는 배제하고 패를 짜서 자기들의 세력을 과시하며, 자기들이 약점과 비성경적 교리의 실천이 정당한 것처럼 내세우기도 한다. 이러한 양상은 곧바로 교파로 이어지며, 성경이 기준이 되지 못하고 총회의 결의나 신조만 지키면 통용이 되고 인정을 받는다. 이로 인해 어떤 교단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한 교인은 자기들 교단 교회가 실행하고 있는 것이 가장 성경적일 것이라고 간주하게 됨은 물론이요, 영적 분별 능력을 잃어버려 그들 교단 교회에 익숙하지 않은 것은 모두 이상한 교리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2. 개혁의 문제점

개혁자들은 콘스탄틴 시대를 교회의 승리로 보는 로마 카톨릭의 해석을 비판 없이 수용하였다. 콘스탄틴은 정치적 통제를 위하여 누구나, 심지어 이교도들까지도 흡수하여 통합적인 기독교회를 시도했다. 이로써 성경적 기독교는 이미 사라졌고 형식적인 기독교가 되었던 것이며, 이교도들까지 참여함으로 인해 형식적으로만 기독교화된 "기형적인 기독교 형태"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개혁이란 단순히 교황권에 대한 도전이었을 뿐, 로마 카톨릭 교회의 제도와 실행을 타파하기 위한 신학적 교리적 개혁은 아니었던 것이다. 따라서 개혁은 형식상의 개혁이었지 내면을 바로 잡는 개혁은 되지 못했다. 그들은 여러 가지 부패와 오류로부터 정화시켜야 할 필요성은 공감하면서도 교회라는 일체감에서 제외되기는 원치 않았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와 제도적으로는 완전히 분리된 이후에도 개혁 이전의 로마 교회와의 연속성을 의식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당시 개혁자들은 개혁 이전의 교회 형태를 여전히 교회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재침례교회 회원들을 위시한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 즉 카톨릭에 항거하고 박해받던 이들은 로마 교회를 성경적 교회로 보지 않았고, 따라서 로마 교회를 교회로 인정한 개혁자들을 완전한 개혁자로 보지 않았다.

3. 개혁자들이 범한 오류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 잘 몰라서 실수한 사람들을 꼬집어 거짓 교사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아폴로가 침례인 요한의 침례만을 가르쳤다고 해서 그를 거짓 교사라 하지 않는다(행 19:1). 종교개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카톨릭 세력에 항거한 루터의 자세는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본받아야 할 것이다. 창세기 3장에서 시작된 영적 전쟁은 하루도 쉬지 않고 지속되고 있으며 이 전쟁에서 희생자가 되지 않으려면 전신갑옷을 입고 믿음의 방패와 성령의 칼을 차고 성령충만하여 싸움에 임해야 한다.

그러나 루터가 개혁의 횃불을 밝히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당시 개혁 교회들에 참여한 교인들은 교회를 운영함에 있어서 카톨릭식 전통을 처리하는데 실패했다. 그들은 교회의 의식과 운영에 있어서 다분히 카톨릭적인 것을 그대로 실행하면서 개혁 교회를 운영한 것이다.

그 중 하나가 유아세례였다. 그들은 로마 카톨릭의 전통에 따라서 성인뿐만 아니라 유아들에게도 세례를 주었던 것이다. 여기에 대한 용어 역시 "침례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세례를 받는 것"이 되었다. 개신 교회들은 어느 교단할 것 없이 모두가 세례를 주고 받았으며, 그런 관습은 계속 이어져 교단적 전통으로 깊숙히 자리잡게 되어, 심지어 많은 교단 신학교에서는 세례가 침례보다 성경적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실정이다. 루터의 유아세례는 칼빈이 범한 "국가와 교회의 연합"의 오류와 맞먹는 중대사이다.

카톨릭의 전통은 교회의 의식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 양상으로 표출되었다.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 예배의식, 새벽예배(미사), 금요 금식 등은 개신교회에서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으며, 그 외 교회의 운영면에 있어서도 이들은 카톨릭의 구습을 여전히 따르고 있는 것이다.

존 칼빈은 스위스의 개혁주의자이면서도 "교회 국가"의 창시자가 되었다. 하나님의 교회는 사탄이 주관하는 세상과 분리해야 성경적 성별이 이루어지며(고후 6:14-16) 거듭난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들어가 유기체를 이루고 그 유기체가 지역 교회의 형태로 될 때 조직체가 되어 구령하고 양육하며 교제하고 선교하며 침례식과 주의만찬의 의식을 행하고 그 외 필요한 사역을 수행해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국가와 교회와의 연합을 이룩함으로써, 거듭남과는 관계없이 단지 교회에 속함으로 교회 회원이 된 자들, 즉 그리스도인이 아닌 교인들로 만연된 사회를 만들게 되었다.

물론 모든 개신 교회가 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 중에는 신실한 주의 종들이 있을 것이고 성경대로 믿으며 성경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일지라도 카톨릭 전통을 실행하는 교회에서 그가 홀로 무엇을 어떻게 해낼 수 있겠는가? 교회에 등록한 것으로써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착각하는 것 중에는 극단적 칼빈주의에 의한 영향도 상당히 크다. 즉 교회에 등록한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은 하나님의 예정 속에 들어와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언제 구원받았느냐고 물으면 그 대답은 모태 신앙이라든지, 어려서부터 주일학교에 다녔다든지, 몇 살 때부터 교회에 다녔다든지, 언제 안수 집사가 되었다든지, 장로된 지 몇 년 째라든지 하는 것이다.

이들 개혁주의자들이 범한 또 한 가지 오류는 예수 그리스도 없이 이 땅에 천국을 오게 하자는 데 있다. 후천년주의자들은 이 세상에 천 년 간의 평화가 온 다음에 예수님이 오신다고 거짓말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이 도둑 같이 오신다고 하셨지 일 천 년 동안 평화가 유지된 후에 오신다고 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말하는 일 천 년 간의 기간이란 그것을 미끼로 로마 교회가 정치적, 종교적 권세를 누리기 위해 세계평화를 외치는 것일 뿐, 그들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그저 한 번 해 보는 소리에 불과한 것이다.

마치 삼위일체의 의미는 몰라도 그것을 믿는다고 하면 잘 믿는 사람으로 취급받는 것과 같은 실상이라 하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을 통치하신다는 것에 대해 확신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그분의 재림의 성경적으로 믿지 않는 것이다. 무천년주의자나 후천년주의자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확신을 갖지 않는다는 면에서는 마찬가지이다.

개혁주의자들에게는 지역교회의 개념이 없다. 무지한 사람들에게 늘 추종할 지도자가 필요한 것은 그들 스스로 추진해 나갈 능력도 지혜도 없기 때문인데, 이들도 마찬가지로 늘 지시와 방향이 필요하며, 그 지시와 방향에 따르기만 하면 일단은 합격이다. 독자적으로 성경을 해석할 줄 모르는 사람은 늘 주석가를 붙들고 있어 그 주석가가 틀리면 그도 함께 틀리게 된다. 이것은 자기의 무지에 대한 변상을 그런 방법으로라도 감수하는 것일 것이다. 그래서 루터를 따랐던 사람들은 유아세례든지 카톨릭식 전통이든지 루터가 했던 대로 무조건 따랐을 뿐이다.

교회 직제든지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이든지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의 암송이든지 축도든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며, 부활절이든지 추수감사절이든지 크리스마스든지 성경을 제쳐 두고 추종하는 우두머리가 하는 대로 따라서 한다.

칼빈주의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극단적 칼빈주의 교리든지, 교회 국가든지, 성경을 제쳐놓고 칼빈이 하는 대로 따라서 한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일제시대 신사참배를 거부함으로써 많은 박해를 받았던 장로교 고신파가 있다. 그들은 그들의 선배가 일본 제국주의의 기세 앞에서도 우상을 거부했다는데 대단한 긍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신사참배를 하지 않은 그 분들의 정신은 계승되지 않았다. 순교자의 후예가 순교자의 믿음을 전수 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근본주의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적 근본주의를 실천했던 사람들은 다른 개신 교회들의 미지근함에 환멸을 느끼고 성경대로 실행하자고 나선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후예라고 자처하고 나선 20세기 후반의 밥 존스 대학교 출신들이나 성서침례교회 친교회 목사들은 그들의 믿음을 전수받지 않은 상태에서 스스로 근본주의만 외치고 있다.

주님은 집단을 상대하지 않으시고 개인을 상대하신다. 예수님의 영으로 거듭난 사람을 성전으로 삼아 주시고 그 안에 내주하시어 그 사람을 진리로 인도하신다. 그리하여 그 사람으로 하여금 진리를 따라 살게 함으로써 죄의 종이 되지 않게 하시고 아들이 되게 하신다. 그 사람은 진리를 깨달아 아들이 됨으로 죄의 종에서 벗어나고 진리가 자유케 해 준다는 사실을 실토하게 되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교파로, 교회로, 칼빈주의로, 알미니안주의로, 근본주의로, 복음주의로, 선교단체로 인하여 같아지는 것이 아니고 진리에 순종하는 각 개인에 따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개인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도화된 과정을 통하여 주의 일꾼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설픈 일인가는 본인 자신이 잘 알게 되어 있다.

개혁주의자들은 성경적 지역교회를 세우는데 실패하였다. 루터와 칼빈은 훌륭한 개혁주의자이지 훌륭한 신학자는 아니었다. 그들은 성경적 지역교회의 의미를 몰랐다. 그들은 카톨릭 교회를 반대하면서도 카톨릭 교회를 철저히 부인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거대한 용의 실체를 어느 정도 인정해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비성경적 교리를 실천하는 부류들과는 뒤섞이지 않고 성경적 성별을 부르짖었던 사람들은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기 전 무려 1400년 전부터 존재해 왔다.

이들은 영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로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성경을 보존하였고 복음을 확산시켰으며 믿음을 올바로 지킨, 성경대로 믿는 무리들이었다. 그러나 개신 교회들은 이들 초대 교회 이후 믿음을 지켜 온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을 잘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들의 믿음과 실행이 자기들의 믿음의 요지와 다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개신 교회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친카톨릭적 성향을 보이는 반면 이들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은 반카톨릭 성향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침례 교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스스로 개신교임을 자부하는 침례교회, 특히 미국의 남침례교회와 우리 나라의 기독교 한국 침례회는 침례를 주는 것 외에는 다른 개신교와 별로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성경 침례교회(Bible Baptist Church)는 카톨릭 교리를 정면으로 거부하며 어떤 형태의 카톨릭 교리에도 동조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성경침례교회는 성서침례교회 (Baptist Bible Fellowship)가 아님].

루터보다 1400년 앞서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1세기에는 유프라테스 강과 아르메니아와 소아시아 지역에 산재해 있었던 폴리시안(Paulicians)이 있었다. 이들은 바울의 가르침에 치중하였다고 해서 폴리시안이라고 불렸다. 150년 경에는 소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지방에 산재해 있던 몬타니스트(Montanists)가 있었고, 노바티안(Novatians), 도나티스트(Donatists), 발렌티안(Valentians), 4세기 때의 메살린(Masslians), 비질란티안(Vigilantians 4-5세기), 이코노다스트(Iconodasts, 7-9세기), 보고밀(Bogomils, 10-15세기), 파테린(Patarines, 11세기), 베렌가리우스(Berengarius, 1215), 아놀디스트(Arnoldists, 12세기), 헤리시안(Hericians, 12세기), 페트로브루시안(Petrobrussians, 12세기), 베가드(Beghards, 12세기), 왈덴시안(Waldensians, 12-13세기), 카타리(Catharists, 12-13세기), 알비겐스(Albigenses, 12-13세기), 롤라드(Lollard, 14세기), 후스파(Hussites, 15세기), 타볼파(Taborites), 재침례파(Anabaptists) 등 순수한 신앙을 지킨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은 항상 있어 왔다.

이들을 모두 열거할 수는 없지만 이들은 모두 루터의 종교개혁 전후로 일어난 주님의 신실한 제자들이다. 유리하며 걸식하고, 재산을 몰수당하기도 하고, 집단으로 고문당하고, 때로는 공개로 처형당하기도 하고, 화형을 당하기도 했다. 이처럼 목숨을 걸고 믿음을 지킨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형식상의 교인들은 기회주의자로 행세하며 몸을 도사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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