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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6월 2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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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동참자가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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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난의 동참자가 되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영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영이라. 그러므로 너는 우리 주의 증거나 그의 죄수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에 따라 복음을 위하여 고난의 동참자가 되라.](딤후1:7-8)

본문은 사도 바울이 영적인 아들인 디모데에게 보내는 서신으로 바울은 그에게 권면할 필요를 느꼈고 그에 따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바울의 권면은 디모데 에게만 필요한 권면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권면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 내용은 고난의 동참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유의해 볼 것은 복음의 동참자가 되라는 말이 아니라 고난의 동참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고난의 동참자가 되라는 말에는 사도 바울 자신과 같은 처지가 되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복음 증거하는 일로 죄수 아닌 죄수로 옥에 갇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디모데에게 죄수 된 자신을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 너도 나와 같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히는 일을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는 비장한 각오를 하게 하는 말인 것입니다.
그 일을 또한 이상히 여겨서도 안됨을 말하려는지 바울은 오히려 우리가 그 고난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9절에 말씀에 거룩한 소명으로 부르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난으로의 부르심이 거룩한 소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부르심은 영광으로 부르신 것이 확실하지만 또한 고난으로 부르신 것이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 역시 그리스도인이 고난에로 우리를 부름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잘못들로 인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영광이 있겠느냐? 그러나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고 참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것이 되느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우리에게 한 본을 남겨 놓으시어 너희로 그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셨느니라.](벧전2:20-21)
빌립보서에서도 이 같은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것이 너희에게 주어진 것은 그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는 것이니](빌 1:29 )
롬8장에서도 영광이 고난과 함께 나오고 있습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들이니 하나님의 상속자들이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공동 상속자들이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서는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하리라. 이는 현재의 고난들이 우리에게 나타나게 될 영광에 감히 비교되지 못한다고 내가 여기기 때문이라.](롬 8:17-18)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그럼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한 공동 상속자들입니다.
여러분은 장차 영광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고난이 없다면 영광도 없다는 것입니다. 영광을 받기위해선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그리고 상속도 없다는 것입니다. 상속자는 상속자인데 상속받을 유업이 없습니다. (물론 영광스런 몸과 새 예루살렘은 고난과 관계 없이 상속 받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현재의 고난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영광을 누릴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영광에로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지도 말아야 합니다. 현재 우리가 부름을 받은 것은 고난에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현재 누릴 것은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고난을 누린다는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가 피해서는 안될 고난이라면 누릴 수 있습니다.
실재 사도 바울은 고난을 즐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빌3:10에서 주님을 위해 당하는 고난을 고난의 교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앞으로 누리게 될 영원에서의 찬란한 영광을 위해 지금 있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고난이라는 사실입니다.
고후4:17-18에서도 이 같은 내용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잠시 받는 가벼운 환난이 우리를 위하여 훨씬 뛰어난 영원한 영광의 비중을 이루어 가기 때문이라.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보이는 것들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들이라. 이는 보이는 것들은 잠깐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은 영원하기 때문이라.]
다가올 영광을 무엇으로 준비하는 것인지 보셨습니까? 고난입니다.
이 땅에서의 고난의 삶은 잠시 잠깐 있고 말 것입니다. 영원에 한번 비교해 보신다면 보이지도 않을 시간임을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원과 주님오실 때까지의 이 땅에서의 삶을 비교해 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또는 초대교회시대의 성도들이 받았던 고난과 지금 여러분이 받을 고난을 비교해 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아니 지금도 공산권이나 빈민 오지의 나라에서 선교하고 있는 선교사들의 고난과 여러분의 고난을 비교해 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여러분은 왜 내가 그들이 받는 고난과 비교를 해야 하느냐고 반문하십니까?
왜냐면 그들이나 여러분이나 똑같이 고난으로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종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들과 나를 비교함으로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나의 믿음 없음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나의 열매 없는 삶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참으로 우리는 부끄러워해야 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땅히 부끄러워해야 할 일들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결코 부끄러워해서는 안 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죄수 된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또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사도 베드로 또한 [그러나 만일 너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당하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4:16)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욕을 당하면 복이 있느니라.](벧전4:14)
[도리어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는 것이니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이 나타나실 때에 너희도 큰 기쁨으로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벧전 4:13) 고 말합니다.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베드로사도 역시나 고난을 즐거워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그 분의 이름을 위해 모욕을 받기에 합당한 자로 여겨짐을 기뻐하며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 5:41)
그러므로 우리의 체질은 바뀌어야 합니다.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 라고 말씀하시는데 실재 이전과는 다른 체질로 바뀔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대게 화나는 일이 있으면 몸에서 아드레날린이 분비된다고 합니다.
반대로 웃거나 기분 좋은 일이 있을 때는 엔돌핀이 분비된다고 하는데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체질이 반대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고난이 오고 핍박이 오면 엔돌핀이 생기고 반대로 평안하고 좋은 일이 있으면 아드레날린이 생기는 체질로 말입니다.  
농담같은 이 말에 사실 뼈가 있지 않습니까? 고난과 핍박이 있어야만 상이 있고 유업이 있다는데 왜 고난이 왔을 때 엔돌핀이 생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고난이 없으면 상도 유업도 없다는데 그 사실을 안다면 왜 아드레날린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생겨야 합니다. 우리의 체질은 이처럼 바뀌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마드라스에 한 선생이 한번은 트라반코레라는 마을에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꼬마 사도'라 불리는 한 노예 소녀를 만났다고 합니다. 그녀는 별명에 어울릴 만큼이나 복음 전하는 일에 열심이었답니다. 이 같은 소녀의 조용하고도 꾸준한 개인구령으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소녀는 혹독한 박해를 받아, 얼굴과 팔 등 온 몸에 맞은 자국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를 본 그 선생이 눈물지으며 '꼬마야, 이런 매질을 어떻게 참았느냐?'라고 묻자 그 소녀는 웃음 지으며 '선생님은 그리스도를 위해 고통받는 것이 즐겁지 않으세요?'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제가 아는 한 형제도 복음을 전하다가 건달들한테 복부를 맞고 쓰러졌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그 형제도 배는 아프지만 너무 황홀했다는 것입니다. 왜냐고 물으니까 이 일로 상급이 쌓였을걸 생각하니 황홀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오히려 반문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고난을 어떻게 바라보십니까?
고난은 영광을 가져다 줍니다. 그것도 받은 고난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에 영광이 기다립니다. 주님은 되로 주면 말로 갚아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고난은 다가올 영원에서의 영광만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고난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도 많은 유익을 가져다 준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유익을 가져다 준다는 것입니까?
시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헤맸으나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고난은 누구에게나 견디기 어려운 시련인데 시편저자는 고난을 통해 방황하는 삶에서 주의 말씀을 지키는 삶으로 바뀌었다고 고백합니다.
[내가 고난을 당한 것이 내게 좋사오니 이는 내가 주의 규례들을 배우게 되기 때문이니이다.](시119:71).  무엇을 배웠기에 고난 당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좋다고까지 고백하는 것이겠습니까?  과연 고난을 통해서 무엇을 배우게 되는지 성경으로 확인해보며 우리도 배워보도록 하겠습니다.

1.주님의 위로를 배우게 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기 때문이라.](고후1:5)
위로라는 단어가1-7절까지에서 9번이 나옵니다.
이를 직역하면"자기의 곁으로 부르다"는 뜻입니다. 고난이 왔을 때 주님 곁으로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와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위로 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명을 맡기시면서 그들에게 어떤 격려나 위로의 말씀을 하실만한데도  구체적인 위로의 말씀은 하지 않으시고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마28: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보라, 내가 세상 끝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시더라. 아멘.]
사실 주님이 함께 하심을 안다면 그 자체가 어떠한 고난으로부터 위로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은 고난의 날에 누구를 부릅니까? 어머니나 아버지 또는 아내들은 남편을 부릅니다. 남편만 곁에 있으면 안심이 되겠다. 그냥 있어만 주어도 위로가 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면 그래서 그 분이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 자체만으로 얼마나 든든하겠습니까? 위로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고난을 통과하지 않고는 이러한 하나님의 넘치는 위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성령으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성령께 위로자라는 이름이 사용됩니다.  [그러나 내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하노니 내가 가는 것이 너희에게는 유익하니라. 만일 내가 가지 아니하면 위로자가 너희에게 오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나 내가 떠나가면 내가 그 분을 너희에게 보낼 것이라.](요 16:7)
성령은 성도를 위로하시기 위해 성도 안에 내주 하십니다. 그런데 정작 성도에게 위로 받을 일이 없다면 어찌 됩니까? 성령은 위로 자로써의 임무를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럼 성령의 위로를 경험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하고 성령의 임재 또한 느끼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가 고난을 통한 위로를 배울 수 없게되면 다른 성도들을 위로할 수도 없게 됩니다. 결국 그 것은 그들을 섬길 수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 주위에 연약한 성도를 두신 것은 그들을 섬기게 하기 위함입니다.
섬기는 일은 그들을 위로해주는 일이 많은 비중을 차지합니다. 그만큼 위로가 필요한 게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성도가 고난을 받아야 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위로를 배워야하는 것은 그가 다른 연약한 성도들을 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분이시라.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써 어떠한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도 위로할 수 있는 것이라.](고후1:4)
하나님의 위로가 나만을 위함이 아닌 것을 보십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내게 필요한 위로와 연약한 지체들의 섬김을 위해서 고난에 동참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2.신뢰를 배우게 됩니다.
[형제들아, 아시아에서 우리에게 닥쳤던 고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우리가 받은 극심한 압박으로 인하여 견딜힘을 잃어 심지어는 삶의 절망에까지 이른 것이라. 우리는 우리 자신 속에 사형 선고를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우리 자신을 신뢰하지 아니하고 죽은 자들을 살리시는 하나님만을 신뢰하게 하려 함이라.](고후 1: 8-9)
바울은 자신이 당한 고난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견딜힘조차 없을 정도로 고통을 받아 바울의 삶은 절망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을 바울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훈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난이 주는 의미를 바로 깨달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의뢰하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라고 고난을 주십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아래 딤후1:12절을 보아도 고난이 신뢰를 배우게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연유로 내가 이러한 고난을 당해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내가 믿은 분을 알고, 내가 위탁한 것을 그 날을 대비하여 그분께서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1:12) 사도 바울의 이러한 확신에 찬 신뢰는 이론으로 얻은 게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경험이 없이 전적인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신뢰를 배우기 위해 고난의 동참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3.훌륭한 군사가 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런즉 너는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군사로서 고난을 견뎌내라.](딤후2:3)
군인을 군인답게 만드는 것은 훈련일 것입니다. 신병입대를 하면 신병 교육대에서 훈련을 받습니다. 훈련에는 말 그대로 고난이 따릅니다.
에어콘이 나오는 사무실에서 작전계획을 배우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들은 장군들이나 참모들이 하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지나다가 동네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이들을 보니 뭔가 신중히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었기에 이 지나던 사람이 아이들에게 물었답니다. "애들아 너희들 뭐하고 노니?" 그러나 아이들의 대답이 "전쟁놀이 해요" 하더랍니다.
이 사람이 의아해하며 다시 물었답니다. "그런데 왜 총소리도 들리지 않고 뛰어다니지 않니?" 라고 물었습니다. 아이들의 대답이 " 우린 장군들인데 작전 짜고 있는 거예요!" 하더랍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작전참모나 장군들이 되길 원치 않으십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은 성도들이 교회 안에 모여서 어떻게 하면 교회가 부흥될까? 어떤 전도방법이 이 시대에 요구되는 탁월한 전도방법일까?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하면? 될까? 의논 자들이 되기를 원치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저희 집에 기독교 신문이 신청도 안 했는데 배달이 되고 있어 보고 있습니다. 그 신문을 보다보면 무슨 무슨 전도 세미나, 민족 복음화를 위한 직분자 세미나, 무슨 세미나, 토론회들이 그리 많은지요?  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데 무슨 세미나가 필요하고 토론회가 필요합니까? 나가서 전하면 되지요?
알고 보면 세미나니 토론회니 하는 것들의 본질은 고난을 피해 보자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하면 세상사람들에게 욕먹지 않고 친근하게 다가갈 것인가? 세상이 요구하는 전도방법은 무엇인가? 그런 것들입니다. 그래서 나오는 것들이 교회건축, 열린예배, 경배와 찬양, 워쉽댄싱, 무료영어공부, 이웃초청입당예배잔치, 건강전도지, 그런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다 뭡니까? 다 어떻게 하면 고난을 받지 않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을 피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군사가 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군대에서도 보면 일명 뺀질이들이 있습니다. 훈련이 다가오면 어떻게든 훈련을 안 받아 보려고 갖은 머리를 굴립니다. 일부러 병을 만들거나 키우기도 합니다.  
평소에 한하던 운동을 지나치게 하기도 하는데 다리라도 삐기를 바래서입니다.
이런 군인을 훌륭한 군인이라고 누가 인정하겠습니까? 훌륭한 군인은 고난받기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고난을 인내로 견뎌내는 군인이 훌륭한 군인입니다. 여러분은 훌륭한 군인입니까?
형제, 자매, 모두가 다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군사가 되어야 합니다. 고난이 주는 유익이 무엇입니까? 훌륭한 군사로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동참자들이 되어야합니다.

4.인내를 배우게 됨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을 너희가 앎이라.](약 1:3)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때로는 시련의 형태로 오기도 합니다.
시련은 고난과는 다르지만 어짿든 믿음 때문에 당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볼 때 같고 시련이나 고난이 결과적으로 인내라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인내라는 것은 참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순간 순간을 이겨내는 삶을 말합니다.
어쩔 수 없이 푸념하며 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이 번에도 올 것이 왔구나하는 비장의 각오로 그 순간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이 인내는 성도의 살아있는 믿음을 요구하는데 생명력 있는 삶을 살게 해줍니다.
그러나 과연 고난이라는 게 없다면 이런 살아있는 믿음이 요구되거나 생명력 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편안하면 나태해지게 마련이고 그렇게 되면 하지 말아야 할,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 자신의 존재의 위치를 망각하게 됩니다.
어떤 해안 마을에 등대가 없어서 계속 배가 좌초되어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고는 일이 있었답니다.  보다못한 그 해안가 사람들이 구조대를 만들어서 배가 오면 후레쉬를 비춰 신호를 보내어 배를 안전하게 보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이런 일이 잘 이루어졌는데 어느 날 부터인가 경비원들이 지키고 있음에도 배가 계속 좌초되는 일이 일어나더랍니다. 왜 그런가 원인을 추적해 보니 어떤 경비원이 의자 하나를 그 곳에 갖다 놓았는데 경비들이 그 의자에 앉아 있다가 졸면서 경비를 봤다는 것입니다.  그 때부터 경비가 있으나 마나 한 존재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경비를 서는 사람이 편안하기 위해서 그 자리에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경비입니다. 파수꾼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태평한 삶은 독약과 같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고난이 있고 핍박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고난이 오면 정신을 차리게 되고 삶의 자세가 달라집니다. 당면한 위기를 어떻게든 넘겨보려고 몸부림을 칠 것입니다.
청어와 매기 이야기를 아십니까?
영국 북쪽 바다에서 청어 잡이를 하는 어부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런던까지 청어를 싱싱한 채로 살려서 가지고 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살아있는 고기가 더 값이 나가기 때문이죠. 그래서 어부들이 최선을 다해 보지만 배가 런던에 도착해보면 청어들은 거의 다 죽어있습니다. 그런데 한 어부만은 언제나 북해에서 잡은 청어들을 싱싱하게 산 채로 런던에 가지고 와서 큰 재미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동료 어부들이 이상해서 그 어부에게 물어보았지만 쉽게 그 비결을 가르쳐 주지 않았답니다.
마침내 동료들이 사정사정하자 그는 입을 떼고 말했습니다.
"나는 청어를 잡아넣은 통에다 메기를 한 마리씩 집어넣습니다."
그러자 모든 어부들의 눈이 커지면서 "그러면 메기가 청어를 잡아먹지 않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그렇지! 메기가 청어를 잡아먹지. 그러나 놈은 두 세 마리밖에는 못 잡아먹네. 대신 통 안에 있는 수 백 마리의 청어들은 잡혀 먹히지 않으려고 계속 도망쳐 다니지. 그 몸부림이 그들을 살아있게 만드는 비결이라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 메기가 성도들의 삶에 있는 고난이라고 말하려는 것입니다.
고난이 없는 삶은 무미건조하여 결국 성도의 영적인 생명에 치명타를 가하게 됩니다.
그러나 고난이 있는 성도는 그 고난 때문에 하나님께 매달리게 됩니다. 삶에 간절함이 있습니다. 고난이 있는 성도와 없는 성도의 삶은 결코 같지 않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복음을 거부하는 자에게는 영원한 죽음이 주어질 것이고 복음을 전하지 않는 성도에게는 영적 죽음이 주어지게 된다.}
오늘 말하는 고난도 복음을 위한 고난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아무고난도 아무 일 없는 무사 태평을 기도해서는 안됩니다.
버스나 택시를 타면 "오늘도 무사히"라는 기도 내용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말 그대로 운전기사들에게나 필요한 기도입니다. 또는 많은 종교인들에게나 어울리는 기도내용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결코 그런 기도를 해서는 안됩니다. 왜냐면 고난이 우리로 인내를 배우게 하기 때문입니다. 생명력이 있는 영적이 생명의 삶을 살게 해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고난의 동참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커다란 돈주고 살 수 없는 유익이 있기에 성경은 오늘 본문으로 우리에게 고난의 동참자가 되라고 과감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유익이 복입니다.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벧전4: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욕을 당하면 복이 있느니라.
이러한 영적인 복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의 상급과 천년왕국에서의 유업과 영원에서의 영광이 이 때의 고난에 의해서 좌우된다는 사실입니다.
고후4:17 [이는 우리가 잠시 받는 가벼운 환난이 우리를 위하여 훨씬 뛰어난 영원한 영광의 비중을 이루어 가기 때문이라.]
여러분이 이러한 사실을 앎에도 복음을 위하여 고난의 동참자가 되기를 주저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주저하십니까? 혹시 복음을 부끄러워하십니까?
복음의 주체가 되시는 예수그리스도를 부끄러워하십니까? 여러분의 구주를 부끄러워하시냐는 말입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자신의 어머니가 허름한 옷차림을 하고 자신이 잊고 온 도시락을 챙겨서 오셨는데 창피해서 자기 어머니를 부인하던 아이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자신을 위해 수고와 희생을 아끼지 않던 어머니를 자기 체면 때문에 부인했던 아이를 여러분은 어떻게 보십니까?  그런 아이를 향해 '배은망덕'이라는 말을 쓸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여러분의 죄를 대신해서 형벌 받으시고 죽으시고 지옥의 고통을 감내하심으로 여러분을 구원하여 영생을 주셨는데 여러분은 그 분을 부끄러워하시는 것입니까?
주님이 부끄러워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면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혹 복음을 전하다가 당하게 될 고난이 두렵기 때문입니까?
오늘 본문은 우리가 받은 영은 두려워하는 영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은 두려움을 갖게 하는 영이 아닌데 그럼에도 두려움을 느낀다면 악령에 지배를 받아서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눅 12:4~5 [내가 내 친구들인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난 후 더 이상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러나 너희가 누구를 두려워해야 하는지 내가 보여 주리라. 죽인 후에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를 가진 그 분을 두려워하라. 정녕,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 분을 두려워하라.]
저와 여러분이 부끄럽게 여겨야 할 것들을 부끄럽게 여기고, 두려워해야 할 대상을 두려워한다면 복음을 위하여 고난의 동참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동참자에게 이 땅에서와 영원에서의 복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기쁨으로 동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주님께서 고난에로 부르시는 부르심에 순종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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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칼럼] 나는 지금이 왜 "라오디케아" 시대라고 믿는가?  관리자 04·07·05 4972
22   가족을 돌아 보라  관리자 04·06·08 6573
21    성경적 자녀 양육법  관리자 04·05·05 7240
20    왜 주님을 따라야 합니까?  관리자 04·04·22 5574
19    지옥에 간 부자를 기억하라  관리자 04·04·22 6558
18    보시기에 아주 좋았더라  관리자 04·04·02 5649
17    보혈을 통한 구속  관리자 04·02·25 5638
16    주의 은혜로  관리자 04·02·15 6522
15    의인은 믿음으로 ..  관리자 04·02·08 5143
14    복음, 누구를 위한 것인가?  관리자 04·01·22 4869
   고난의 동참자가 되라  관리자 04·01·22 5308
12   내가...하리라!  관리자 04·01·11 4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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